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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어두운 시대 민족의 횃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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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어두운 시대 민족의 횃불

11월 17일은 민족운동가, 독립운동가, 교육자 그리고 예술가인 우당 이회영이 영면한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109년 전인 1905년 11월 17일 이미 보름 전부터 본국 정부로부터 군대 동원령을 하달 받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 와의 지휘하에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된다. 덕수궁 중명전은 자금도 말없이 그날을 되새기며 눈물 흘리고 있다. 이 중명전에서 민족지도자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1867.4.21~1932.11.17)과 그 6형제의 행적과 사상과 민족사랑의 정신을 기리는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바로 ‘난잎으로 칼을 얻다’란 제하의 전시. 행사이며 이는 갑부 우당과 형제들이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과 후진 양성 그리고 조국독립의 밑거름으로 쓰고 나서, 후에는 세끼를 먹지 못하는 가난 가운데 생활자금,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난을 치던 일을 상기시키는 제목의 행사라 한다.

이회영과 그 형제들은 이 땅의 갑부로서 재산을 처분하여 당시 소 13000마리에 해당 하면 현재가 수조원대의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썼다. 선생은 교사로 활동하다 신민회의 창립 하였고, 서전서숙을 설립하였으며 일가 6형제와 함께 유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을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상하이에서 아나키즘사상에 심취하였으며 1928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1931년 항일구국연맹 등의 창설을 주도하였으며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1년 9월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본과 일본 관련 시설의 파괴, 암살을 지휘하였으나 1932년 11월 상하이 항구에서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옥사하였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17일 “우당 이회영 선생은 나라가 어려울 때 배운 자, 벼슬한 자, 가진 자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거울”이라며 이같이 말하며, 우당 선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누차 강조했다.

우리 사회는 오늘 일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어 3만 달러를 향하고 있다. 많은 부자들과 재벌들이 있고, 도처에 명품과 호화로운 상품과 소비재가 넘처난다. 그리고 우리에게 동시에 가난한 사람이 넘처 나고 노숙자와 걸인과 가출 청소년과 생계와 삶이 외로운 노인들이 넘쳐난다. 경쟁에 지쳐 포기한 자살자와 스트레스성 성인병자가 넘쳐난다. 저 북쪽에는 기아선상에 헤매는 북녘의 어린이들과 생존수준에 허덕이는 많은 북한 동포들이 있다. 아프리카와 세계 도처에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도 넘쳐난다.

우당은 척박한 시대에 억압받는 민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 놓았다. 자신의 열정과 시간과 재산을 내어 놓고 다른 사람들과 민족의 독립과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더 나은 자유를 위해 더 고르게 잘 사는 독립된 나라를 위해 전진했다. 유학을 배워 인륜과 도덕의 근본 사상을 체득하고 이후 기독교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 땅에 실천해 보고자 자신의 시간과 열정과 재산을 내어주고 전 삶을 바쳤다.

우당과 그의 6형제가 동의하여 공동으로 함께 그런 일을 시작하고 일정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는 자신 삶의 온 목표를 이룩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패배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지향한 정신과 이웃과 더불어 살기 위한 철학과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향한 전진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의 핏속에 흐르고 있다.

그의 이타적 삶과 민족을 사랑한 그의 실천 그리고 그가 죽을지 모르는 대련항까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올곧게 앞으로 나아간 그의 행동은 참 신앙인, 참 지식인 그리고 참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다.

선생은 임시정부의 여러 분파주의와 권력욕과 분쟁을 뛰어 넘어 오롯이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이념을 뛰어 넘어 행동하고 실천한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선생의 사상과 행동을 막는 어떤 이념과 제도도 그를, 그의 민족사랑을 향한 열정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척박한 시대의 선생의 삶을 오늘의 종교나 이념의 잣대로 폄훼하는 것은 무모한 일일 것이다. 그의 신을 신어 보지 않고 그 인생을 말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분단 70년이 되어가는 시점에 우당 선생의 민족사랑의 정신과 실천을 되새겨볼 필요가 없을 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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