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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의 문, 카이로 선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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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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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구 박사 연세대학교

장제스가 뜻하지 않게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제기한 것에 대해, 루즈벨트는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루즈벨트가 볼 때에 그 같은 중국의 제안은 고무적인 것일 수 있었다.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를 전제로 하고 있었지만, 그런데 이미 그는 한국의 독립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 구상을 중국에 전달한 바 있었다.

1943년 3월 27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영국 외상 이든에게 전후 만추리아(만주), 한국, 타이완, 인도차이나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여기에서 한국을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1~2개국의 나라가 참가하는 연합국의 신탁 통치를 제안했었다. 신탁통치를 거친다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국을 완전히 독립시킨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장제스와의 회담을 마친 루즈벨트는 최측근이요 열정적 감리교인으로 알려져 있던 홉킨스에게 카이로회담의 선언 초안을 작성하게 했다. 홉킨스는 “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에” 한국이 자유와 독립의 국가가 될 것을 결의한다는 내용으로 정리했다. 그 내용은 영국과의 논쟁을 거치면서 그 표현은 “적절한 절차 아래(in due course) 한국의 자유와 독립이 결정될 것이다”라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스탈린의 동의를 거쳐 확정되었다. 비록 연합국 각 국가의 득실 계산에 따라 처음 내용이 수정되었고 신탁통치라는 조건을 걸었지만, 카이로선언으로 한국 독립의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 이후인 1942년 6월 모두 한국을 떠나야 했을 때까지 600명이 넘는 선교사들과 가족들이 한국을 떠나야 했다. 수백의 선교사와 가족들이 1940년 11월 16일에 인천항을 떠났고, 이후 일본의 노골적 핍박에 무어선교사 부인, 마산의 테이트 등을 비롯한 백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한국을 떠났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후 남아있던 최후 37명의 선교사들은 가택에 연금되거나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다가 연합국의 민간인 억류자 교환의 형식으로 추방되었다.

1942년 3월 6일, 워싱턴의 백악관 근처에 있는, 파운드리 감리교회의 담임목사 해리스는 대통령 루즈벨트와 육군 장관 스팀슨에게 한국독립을 간곡히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때 그는 추방된 재한감리교 선교사 쇼우로부터 한국 상황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듣고 루즈벨트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추방된 재한선교사들 중에는 헐버트나 애비슨과 같이, 이승만의 주도 아래 만들어져 있던 한미협회나 기독교인친한회 등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인물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수백에 이르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각 지역의 미국교회들을 방문해 설교활동을 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한국을 다시 자유와 독립을 누리도록 허락하시길 간절히 기원했다. 이들의 지역 교회 활동이 한국독립의 여론을 형성하는 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907년 이래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추방된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미국 지역교회는 한국의 독립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반일 감정이 합해졌다. 이러한 지역 여론은 이승만 등의 ‘한미협회’와 ‘기독교인친한회’의 적극적 로비 활동과 합해져 미국 의회를 비롯한 미국 정가의 구체적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이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되었고 카이로 선언으로 이어졌다. 한국 독립의 문이 비로소 열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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