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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의 정치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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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구 박사 (연세대)

 

 

 

1907년의 정치학 1

 

 

1907년! 을사늑약으로 모든 외교공관이 서울에서 철수한 상황에서 기독교는 서구와 한국을 이어주는 유일한 매개체였다. 이때, 평양에서 이른바 ‘영적대각성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를 바라보는 눈은 모두 긍정적이지 않았다. 특별히 기독교를 국권회복과 근대 이데올로기로 이해했던 사람들은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교회가 민족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지 않고, “영혼의 구원‘만 내세워, 국가와 민족의 존망을 외면한다고 본 것이다.

1907년 이전, 한국 정계와 근대지식사회는 기독교의 복음을 근대문명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했다. 서양 선교사가 세운 개신교회는 서구와의 정치 통로로 여겼다. 적지 않은 입교자들도 “보호 및 힘을 기대하는 동기”로 교회에 들어왔다. 그러나 1907년 이후 대부분의 기독교회는 이러한 인식들을 철저히 배제했다.

교회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오직 신앙의 영역만 내세워야 했다. 한국의 정치상황과 시대적 상황에 대한 직접적 간구는 약화되었다. 교회는 비정치의 기관이요, 교회생활은 오직 신앙적 영역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각인되었고 민족의 장래는 역사의 주재자인 하나님께 의뢰되었다. 정치적 동기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별도로 민족운동을 벌여야 했다. 그런데 1907년의 사건에는 거대한 역설이 있다. 비정치의 기관을 선언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일제로부터 가장 강력한 반일적이고 혁명적 집단이라는 의심을 받은 것이다.

 

1907년, 수많은 군중들이 평양시내 각 교회로 몰려들었을 때, 이토오 히로부미는 그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미국 예일대학 교수요 목사인 랫(George T. Ladd)를 초청했다. 그때 랫은 “평양 인구 1/3에 해당하는” “다수의 신도를 가지고 있는 도시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이 같은 추세대로 라면 10년 내지 15년 만에 신도 수 100만을 얻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분석한 바 있다. 이 말에 이토오 히로부미는 적지 않게 긴장했다.

1907년의 영향아래 있었던 사람들은 성서의 말씀을 일점일획까지 믿는 사람들이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로, 십계명의 제1계명을 어기면서까지 일본 천황을 신(神)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겉으로는 일본의 정치에 순응하는 것 같지만 천황을 강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직접적으로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고 저항을 하지 않더라도, 일본 국체에 대한 강력한 저항자들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1909년에 있었던 ‘백만인구령운동’ 때에 부르던 찬송, 곧 “십자가 군병들”을 일본의 천황신(神)에 맞서는 100만 명의 군대로 해석하기도 했다. 언제든 일본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잠재적 혁명 세력으로 본 것이다.

 

1907년 이후, 일본의 강력한 바람대로, 분명히 교회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이 확연히 분리 되었다. 묘했던 것은, 교회의 이름으로 일본과 싸우지는 않았지만, 1907년의 영적대각성운동이 어떤 민족운동 단체도 못했던 일, 곧 한국의 독립에 결정적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105인 사건'을 통해 여실히 입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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