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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구원과 나라구원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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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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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이야기

 

-개인구원과 나라구원의 사명-

 

1895년 2월, 육영공원이 폐교되자 조선정부에서 이 학교 학생들을 배재학당에 위탁했다. 이때 이승만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배재에 입학했다. 아펜젤러와 서재필 등과 사제관계를 맺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독립협회와 연결 되었다. 정치 개혁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기 때문에 만민공동회의의 주도자로 참여했고, 그런 이유로 24세의 나이로 중추원 의관(議官)직을 제수 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이 박영효 중심의 혁신내각 제안에 동의하고 추종의 모습을 보이자, 이승만은 역모자로 체포되었다. 그때 조선정부 내부에는 '박영효 일파가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정보가 들어와 있었다.

이승만은 대역 죄인으로 사형언도를 받았고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사형집행을 기다려야 했을 때, 그를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선교사들이었다. 배재학교 스승인 아펜젤러(H. D. Appenzeller)와 벙커(D. A. Bunker)부부를 비롯해 헐버트(H. B. Hulbert)가 찾아왔고 애비슨(O. R. Avison) ․언더우드(H. Underwood) ․게일(G. S. Gale)․ 존스(G. H. Jones) 등도 젊은 개화지식인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이승만은 종신형으로 형량이 낮추어졌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이승만은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다.

감방 안에 있던 어느 날, “네가 너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용서하실 것이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하나님의 생생한 음성이었고, 이승만의 입에서는 “오 하나님, 나의 나라와 나의 영혼을 구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흘러나왔다. 그의 마음에 형언할 수 없는 "안위와 평안과 기쁨"이 찾아왔고, 속에 도사리고 있던 불신감과 증오심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그에게 기독교의 복음은 더 이상 근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자였고 한국인들을 이끄는 구도자(求道者)였다. 그리고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표였다. 여기에 복음이 자신을 구원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한국도 구원할 수 있다는 고백과 확신이 있었다. 한 개인의 내적 회심이 한국을 구원시켜야 한다는 사명 의식으로 연결된 것이다.

석방된 이승만은 6명의 선교사들이 써준 19통의 추천서를 가지고 1904년에 미국으로 갔다. 미국교회는 조지위싱톤대학, 하바드대학을 거쳐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1910년까지 총 185회의 교회강연을 할 수 있게 했고, 윌슨대통령이나 루즈벨트 대통령 등 최고의 정치지도자들과 연결시켜주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한국은 독립할 수 있었다. 이승만의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복음주의 선교에서 회심은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이다. 타락한 삶이 거듭난 존재로서 새롭고 성결한 삶을 살아가야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역사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지하겠다는 고백이 담겨있다.

하나님은 간구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구원자시오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지금 기독자들의 신앙과 간구가 절실한 때이다. 우리가 드리는 간구의 내용과 방향이 어때야 하는 것일까? 젊은 이승만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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