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목회

성경속세상 분류

국가와 질서

작성자 정보

  • 연합기독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2017.3.7.>

국가와 질서

 

하나님의 창조는 질서를 전제한다. 피조세계가 철저하게 질서 가운데 존재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창조하신 세계가 무질서와 혼동 가운데 있게 하셨다면 피조세계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바람과 물, 태양과 달, 모든 행성과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체는 물론 생명이 없는 것들일지라도 어떤 것 하나 질서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질서와 함께, 질서 안에서, 질서와 더불어서 존재한다. 때로 인간은 그 질서의 원리를 깨닫지 못함으로 어리석게도 질서에 역행하는 일들을 저질러서 화를 자초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의 질서(자연 질서)를 통해서 존재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신경을 쓰지 않더라도 각각의 질서와 위치를 따라 존재한다. 만일 인간이 그러한 피조물의 존재 양식과 현상까지 일일이 챙겨야 한다면 인간은 스스로가 먼저 존재하기를 포기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은 상상하지도 못하는 일들을 창조의 질서를 통해서 존재하게 하셨고, 그 관계를 아름답고 신비롭게 하셨기에 놀랍고 감탄할 뿐이다. 인간의 인위적인 힘으로 사계절의 순환을 만들어낼 수 없지만 창조의 질서를 통해서 피조세계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숲을 들여다보면 생명체들이 무한경쟁을 하고 있다. 길이 나있지 않은 숲의 현상은 무질서한 것처럼 보인다. 온갖 나무와 풀들이 엉킨 채 사람이 지날 수 없을 만큼 무질서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에는 철저하게 질서가 있다. 작은 것과 큰 것, 낮은 것과 높은 것, 곧게 자라는 것과 옆으로 기는 것, 아예 땅바닥을 터전으로 하는 것, 높은 곳을 좋아하는 것, 낮은 곳을 좋아하는 것, 습기가 많은 곳을 좋아하는 것과 건조한 곳을 좋아하는 것, 햇볕을 좋아하는 것과 햇볕을 싫어하는 것 등 각각의 위치를 찾아서 그곳에 자리하면서 하나의 숲을 이루고 있다.

겉으로 볼 때는 무질서하고, 혼잡한 것 같지만 그들만의 질서체계에서 자기 영역을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숲을 형성하고 서로에게 생존을 위한 도움을 준다. 비록 경쟁관계에 있지만 질서 안에 있을 때 각 생명체는 생존을 보장받는다. 때문에 그들은 철저하게 질서 안에 있기를 힘쓴다. 이것은 창조의 질서, 또는 자연 질서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그들에게 준 생존의 원리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다. 인간은 질서 안에 있으면서도 질서를 거스르거나 필요에 따라서 무질서를 이용할 줄 아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생존을 위한 질서에 따른 행동만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행동을 할 수 있고, 또한 매우 의식적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질서를 파괴하는 행동한다. 그 과정에서 타락이 있었고, 그 타락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주신의 위치와 상태를 결정적으로 변질시켰다. 스스로 창조의 질서를 이탈하므로 인간은 아름다움과 질서의 복된 상태를 잃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해서 거듭난 사람은 그 질서의 상태를 회복하므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의 위치를 되돌리게 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질서 안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는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다.

국가의 존재도 다르지 않다. 철저한 국가적 질서 안에서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이 그 질서를 파괴했고, 모두가 혼동 가운데서 힘들어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각각의 생각이 다르며 추구하는 목적도 다르다. 하지만 하나님이 국가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법과 국가의 권위를 국민의 뜻에 위탁해서 주셨다. 그렇다고 하면 무질서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모두가 질서를 회복할 수 있도록 최종적인 판결에 순복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의견의 차이와 다툼이 있을지라도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권위를 모두가 존중하지 않으면 질서를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利害에 따라서 상대를 부정하면 자신도 부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 또 다른 한계이기 때문에 스스로 질서를 존중함으로 따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국가적 아름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국가는 하나의 통치기구이다. 통치기구로서 국가는 하나님의 섭리의 대상이며, 동시에 기구이다. 따라서 국가는 질서를 통해서 권위를 확보할 수 있을 때 아름답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국가는 권위를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권위는 국민을 통해서 옹립되며, 국민은 국가의 권위를 옹립하는 과정과 역할을 통해서 권위의 실체를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은 그 권위를 담보할 수 있도록 하는 입장에서 옹립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국가의 권위는 국민으로부터 옹립되는 것이기에 국민의 의식이 중요하다. 탄핵정국의 위기상황에서 국가의 권위를 확보하면서도 불의하고 부정한 것을 바로 세우는 지혜와 의지가 절실한 상황이다.

이제 마지막 판결을 남겨놓고 있는 상황에서 헌법재판소가 어떤 결정을 하든지, 각 개인의 입장이 다를지라도 최종적인 권위를 국민 스스로가 존중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는 매우 심각한 상태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세계는 우리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있는 것조차 부정하게 되는 아프고 슬픈 상태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당리당략과 개인의 생각을 넘어서 최종판결에 순복하는 가운데 통합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가 남겨져 있을 뿐이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