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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며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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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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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며 생각하며

 

누군가 걸었던 곳을 또 다른 누군가 걸으면서 발자국이 이어졌고, 뒤따르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길을 따라서 걷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은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나’와 ‘너’를 만나게 해준다. 사람은 그렇게 길에서 현재와 미래를 이어간다. 오늘도 길에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길은 단순히 공간 이동을 위한 통로만이 아니다. 길을 통해서 관계와 문화를 공유한다. 길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인도한다.

태양이 쉼을 얻기 위해 황해로 찾아들 때 자유공원 팔각정으로 오르는 길은 쓸쓸하다. 황해를 건너온 삭풍이 온몸을 움츠리게 한다. 왜(倭)가 식민지를 시작하면서 남향의 좋은 공간은 제 땅인 것 마냥 자신들이 차지하고, 삭풍이 몰아치는 언덕은 인심이나 쓰듯이 청인(淸人)들에게 살라고 내어주었다. 노도를 몰고 황해를 건너온 삭풍이 지배하는 언덕이었기에 북망산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그곳에 자리한 청인들은 패자의 서러움을 삭이며 비탈에 기댄 채 연명하는 것으로 족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이곳에서 경쟁하던 외인들은 없다. 해방과 함께 패전국이 된 왜는 도망쳐 갔고, 청인들도 망설이면서 일부는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그들의 조국이 공산화 되었기에 돌아가기를 포기한 채 이곳에서 난민의 신분으로라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럭저럭 살 수 있었으나 체류신분이 확실하지 않았고, 우리나라는 반공을 국가 정체성으로 정했기에 중국(당시 중공)국적의 그들은 신분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대만(당시 자유중국)으로 국적을 바꾸던가 아니면 제삼의 세계로 다시 이민을 떠나야 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청인들의 모습이 점차 사라져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6.25전란 이후에 남으로 피난 온 북녘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언제가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과 당장 바람이라도 막을 수 있는 공간이 절박했기에 험한 비탈에 옹색하게 터를 잡은 가건물들이 즐비하게 세워졌다. 청인들이 떠나는 그들이 차지해갔다. 그곳에서 실향민들이 망향의 한을 품은 채 내일의 걱정을 황해의 붉은 노을과 함께 가슴에 묻으며 긴 밤을 맞았다.

한데 몇 년 전부터 차이나타운이 새롭게 조성되면서 청인들이 살았던 그 시대의 저잣거리를 재연했다. 그 덕에 낮이나 주말에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청인들이 상권을 형성했던 거리에 사람이 넘친다. 신청인(新淸人)들이 한류에 편승해 몰려오면서 그들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 자유공원 북서쪽 비탈을 점령한다. 그러나 황해가 붉게 물들 즈음이면 썰물이 빠져나가듯 이 거리는 썰렁해진다.

그 길을 오르면서 구한말 이 길을 걸었던 사람들을 만난다. 왜인, 청인, 그리고 양인들이 벽안의 땅, 은둔의 나라에 제국주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기웃거리며 제나라인양 활보했던 길이다. 더러는 이 언덕 위에 아예 저택과 별장을 짓고 무지한 조선의 경제권을 장악해서 살고 있었으니, 그들에게 이 길은 저녁 산책을 위한 길이었을 것이다. 같은 길이지만 의미가 많이 달랐던 것은 느끼는 자의 몫이리라.

한데 그 많은 사람들 틈에 두려움과 호기심, 탐욕자의 눈이 아닌 따듯함을 느끼게 하는 눈을 가진 몇몇 사람들도 보인다. 다름 아닌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찾아온 양인 선교사들이다. 그들이 처음 조선에 발을 내린 곳, 그곳은 이 팔각정에서 내려다보이는 길을 따라 내항(內港)에 이르는 곳이다. 은둔의 나라 조선을 찾아와서 적지 않게 당황했고, 두려움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복음을 통해서 이 나라를 깨우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처음으로 찾아든 곳이 이곳이다.

팔각정 바로 아래, 청인의 거리와 왜인의 거리가 만나는 꼭짓점에 자리한 카페가 있다. 카페 DAVI다. 간단한 요기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인천 내항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데크가 있어 날씨에 따라서는 여유롭게 쉼을 얻을 수 있다. 우리나라 근대사를 모두 경험할 수 있다고 할 만큼 자유공원 자락의 골목들에는 역사와 이야기가 있다. 사실, 카페 DAVI가 차지하고 있는 건물은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6.25전쟁이 이후 가장 어려운 상황에 찾아온 팀선교회의 왓손(Tom Watson) 선교사가 아내의 이름을 따서 캐더린(Katheryn) 기념관으로 지은 것이다. 그녀는 남편 왓손과 함께 내한하여 사역을 돕다가 1959년 10월 30일 39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별세했다.

왓손은 1961년 3월에 착공해서 1년여의 공사를 거쳐서 완성된 이 건물에서 1962년 7월부터 극동방송의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송출하는 일을 했다. 당시 이 건물에는 사무실이 13개, 스튜디오가 3개, 주조정실과 부조정실이 있었다. 극동방송은 1962년부터 1967년까지 이곳 북성동 연주소에서 방송을 했다. 현재 DAVI가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이 땅은 물론 당시 동토의 땅 북방(러시아, 중국, 몽골, 북한)을 향한 복음을 실은 전파를 쏘아 올리던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한국 근대사의 아픔과 제국주의 지배욕을 채우기 위해서 몰려들어 제나라인양 활보했던 외인들의 모습과 한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땅을 찾았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일행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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