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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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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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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4.>

우정

 

얼마 동안인지 모른다. ‘우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들어보지도 못했던 것이. 한데 갑자기 ‘우정’이라는 말이 들려오니 그 단어를 내 안에서 되새김질을 해야 했다. 왠지 낯이 설고, 그 말 자체가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의 사회적 환경과 인간관계가 ‘우정’이라는 단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갑작스럽게 들려온 ‘우정’라는 단어가 나로 하여금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게 했다.

 

지난 교단 총회 때의 일이다. 회의 기간 중에 일본의 고베신학교 교장을 초청해서 강연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갑작스러운 부탁이라 실례였지만 그는 기꺼이 시간을 내서 한국까지 달려왔다. 고마운 마음이었다. 그렇게 부탁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그들의 습성인데 기꺼이 일정을 조정하면서까지 달려와서 필요한 강연을 해주었다.

 

회의 둘째 날 첫 시간이 고베신학교 교장인 요시다(吉田) 교수의 강연이었다. 주선한 사람으로서 통역을 맡았다. 강연을 시작하면 자신이 오게 된 동기를 말하더니 그 가운데 하나가 통역하는 나와의 관계를 이야기 했다. 그 과정에서 ‘우정’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나와 실제적인 관계는 9개월 정도였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그 기간을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 그런데 그는 소소한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만난 것은 내가 고베신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보니 당시 그는 3학기만 강의를 듣기 위해서 가을에 입학했고, 이듬해 여름에 졸업을 했다. 그렇게 계산해보니 9개월이 맞는 것 같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때 내가 찍어준 사진을 지금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고 신혼시절을 되돌아본다는 것이다. 그는 학교에 올 때 막 결혼을 한 신혼이었다. 그의 기억에 나는 사진을 잘 찍는 사람, 사진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9개월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그는 매우 구체적인 일들을 이야기 했다.

 

그가 먼저 학교를 떠날 때 내게 두 권의 책을 선물로 주었다. 한권은 내가 사진을 좋아하니 홋가이도의 풍경을 담은 사진집이고, 또 한 권은 포켓용 작은 일본어 사전이었다. 아마 다시 그의 마음을 담은 것이리라. 물론 지금도 그 책을 갖고 있다. 그 후 그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나는 그의 학교로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 때 하루 그의 가족들과 함께 만날 수 있었던 것이 그를 대면할 수 있는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근 20년이나 시간이 흘렀다. 아주 가끔씩 전화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은 있었지만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가 나의 요청에 기꺼이 응해주었고, 강연을 허락한 동기를 말하면서 27년 동안의 우정 때문이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그 말을 통역하면서 속으로는 계속해서 곱씹어야 했다. 과연 그가 표현하는 것만큼 의식적으로 ‘우정’을 생각했었는지? 그는 말했다. 비록 9개월이라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후 27년이 지난 지금 그 ‘우정’이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그러한 표현을 통역하면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잠겼다. 과연 요즘 사람들의 관계에서 ‘우정’이라는 가치가 존중되고 있는가? 필요와 이해관계에 의해서 이합집산을 하는 것이 능력이고 현대인의 처세술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정’이라는 말이 낯이 설었다. 요즘 주변에서도 듣기 어려운 말이고, ‘우정’의 가치가 존중되지 않는 현실이 아닌지?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들려지는 단어가 나로 하여금 얼떨떨하게 했다.

 

물질의 가치와 소비능력을 중시하는 사회적 현상에서 자유할 수 없는 형편으로 사는 우리가 지금 잃어버리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채 지나치고 있는 것들 가운데 정말 잊거나 잃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무엇일까? 너무나 일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여 우리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한 채 잊거나 잃어버리게 되는 것들, 그것은 과연 없을까? ‘우정’이라는 단어가 그저 옛 사람들의 삶속에 있었던 추상적 명사로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된다면 과연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오늘을 만족하려고 하는 것일지? 그리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풍요로움을 찾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물질적인 개념으로 그친다면 인간의 존재의미는 그것으로 충족할 수 있는 것인지?

‘우정’이라는 단어를 잊은 채 지내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메말라지고, 무관심과 자기 방어적인 자세로만 만족하려고 하는 것인지? 그 원인을 생각하게 된다.

이종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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