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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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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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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5.31.>

은혜

 

지난 4월 초에 옥상 텃밭에 상추를 비롯한 몇 가지 쌈채를 심었다. 조금 이른 듯했지만 부지런을 떨었다. 하지만 4월의 날씨가 들쭉날쭉하면서 기온 차이가 심했다. 결과적으로 쌈채의 성장속도는 평균보다 훨씬 못 미쳤다. 느리게 성장하는 쌈채들은 나의 조급증을 더하게 만들었다. 옥상에 올라가서 살피거나 물을 주면서 혼잣말을 입버릇처럼 하게 된다. ‘날씨가 왜 이렇지?’ 매일 뭔가 원망스러운 불평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직 여름만큼 물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기에 매일 주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비가 없는 주간에는 두 번 이상은 주어야 한다. 물을 주어야 하는 시간이 적절하지 않기에 신경이 쓰인다. 식물에게 물을 주는 것도 물의 온도도 생각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햇볕의 정도도 고려해서 주어야 하기에 시간이 자유롭지 못한 내게는 차라리 늦은 밤 시간에 물을 주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한 낮, 햇볕이 작렬하는 때는 물을 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시간은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질 녘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여유롭지 못하니 차라리 늦은 밤 시간에 줄 경우가 많다. 물 온도를 생각해야 하니 받아놓은 물을 주는 것이 제일 좋은데 그마저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경우엔 할 수 없이 수돗물을 준다.

쌈채를 심고 그렇게 4주간이 지났다. 자라는 속도가 늦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지만 지난 5월 첫 주일, 지체들 모두가 함께 하는 점심에 쌈채를 올릴 수 있었다. 첫 수확은 감격스러웠다. 늦게 자란다고 탓하기도 했지만 드디어 쌈채를 수확할 수 있을 만큼 자랐고, 교우들 모두가 먹고도 남을 만큼 양도 충분했다. 그 후 한 주간이 지났다. 이제부터는 한 주간에 한 번씩 매주 수확할 수 있게 된다. 당연히 지난 주일에도 쌈채를 올릴 수 있었다. 하우스에서 재배한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향과 식감, 신선도 등 모두가 좋아할 만큼 만족스러운 맛을 선물해 주었다. 점심시간이면 지체들이 쌈채를 먹는 기쁨이 여간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옥상이라는 특별한 장소 때문에 물을 공급해 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물론 물도 제때에 알맞게 주는 것이 요구되지만 식물이 자라서 밥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인간이 하는 역할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이식한 식물이 일단 뿌리를 내리고 나면 웬만한 환경의 변화에 대해서 스스로 대처한다. 다만 인간이 기대하는 것만큼 덜 자랄 수 있고, 보기에도 좋지 않은 모양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죽거나 먹을 수 없게 되지는 않는다. 식물에게 주신 생존의 원리에 충실하게 적응하면서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역할 또한 분명하게 한다.

잠시의 돌봄과 작은 수고를 통해서 인간이 얻는 기쁨과 보람은 정말 큰 것이다. 작은 텃밭이지만 심겨진 작물들이 한 주간 동안 열심히 자라줘서 주일이면 쌈채를 모든 지체들과 함께 나눌 수 있으니 말이다. 심는 일과 물주는 일, 가끔 잡초를 제거하는 일만 하면 한 여름이 되기까지 봄날의 쌈채는 우리의 입과 건강을 지켜줄 것이다. 자라는 속도가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것도 놀랍다. 분명히 토요일에 쌈채를 채취했는데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 채취할 수 있을 만큼의 크기로 자라있다. 신기하다고 할는지, 정말 기적 같다. 어떻게 그렇게 자라서 다시 먹을 수 있게 되는지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영원한 뜻과 섭리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그 깊은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어느 것 하나도 저절로 된 것은 없으니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것을 먹을 때마다 우리는 모두 그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그럼에도 매일 그 은혜로 사는 것을 망각한 채 스스로의 능력으로 사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지난 이틀 동안 살피지 못했다. 지방에 일이 있어서 내려갔다가 오느라 텃밭을 돌보지 못한 것이다.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일찍 텃밭을 찾아 옥상에 올라갔다. 녀석들이 어떤 상태로 있는지 궁금해서다. 이틀 동안 돌아보지 못한 녀석들 보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변함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녀석들은 돌봄이 부족해도 주어진 조건에 따르겠지만 기대한 만큼 자라있었다.

만물을 지으시고 기뻐하셨던 창조주 하나님의 기쁨이 이런 것일까? 아니, 하나님이야 창조에 앞서 생각을 하셨을 테니 만물이 만들어짐을 기뻐하셨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쁨은 성취에 따른 것이라면, 인간은 피조물로서 창조주께서 창조의 원리와 영원한 뜻에 따른 섭리를 확인하고, 체험하는 기쁨이 하겠다. 녀석들은 하나님의 뜻을 변함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기에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며, 그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코 그 은혜가 아니면 인간은 사는 것조차 불가능함에도 그 은혜를 은혜로 확인하지 못하고 있음은 곧 불행을 자처하는 것이 아닐지. 그러한 의미에서 은혜를 확인하지 못하는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자와 같다고 할 것이다.

이종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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