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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응관계와 상응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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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응관계와 상응관계”

골2:9-10 제자감리교회 배익환 목사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모든 관계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응관계와 상응관계입니다. 대응관계는 서로 마주 대하는 평행선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상응관계는 서로의 기와 맥이 통하는 관계이며, 서로 맞아 조화를 이루는 관계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이 두 관계는 존재합니다.

 

신앙을 구구단만 외워서 하는 식으로 하는 것을 탈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적 기초를 외면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냥 여기에만 머물러 있으면 성장하지 않고 진짜 무식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미분 적분 등의 실력으로 계속 발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서로 마주보는 대응관계에서 서로 반응을 하는 상응관계로 관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약혼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불안합니다. 그러나 상응관계는 서로 결혼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대응관계의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제, 즉 상응관계를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같이 움직이고 반응하고 동화하는 관계입니다.

 

대응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다 더 깊이 알거나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산다는 개념의 상응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아담과 하와는 처음에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것은 전능자의 신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주님이 생기를 주셨을 때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것은 이 신성의 통로를 막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막힌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 막힌 통로를 회복시키기 위한“통로”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예수의 육체에 거하셨습니다. 그래서 순종과 불순종이 바로 상응관계와 대응관계를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찌 신성과 인성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DNA 조직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신성은 하나님을 찾아 가게 되어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진 상응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상응관계를 잃어버린 존재가 아닙니까? 우리의 인성을 하나님의 사람답게 쓰지 않습니다. 신성의 회복, 즉 구원은 인성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완성하기 위하여 내 안에 성령이 존재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성에서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인성에서도 이루어져야 정상입니다. 인성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신성이 약하거나 없다는 증거입니다. 내 안에 이 충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성은 인성을 통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성과 인성이 성령을 통하여 조화를 잘 이룬 사람을 신령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적당하게 믿는 것은 대응관계입니다. 나의 뜻만을 이루어 달라는 것이 바로 대응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내게서 이루어지는 것이 곧 상응관계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대응관계는 아직 약혼한 관계입니다. 이 기간이 너무 길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상응관계는 결혼관계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신성이 나의 인성을 통해 자유롭게 나타나는 것이 곧 상응관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나를 모르시고 아시는 관계가 대응관계와 상응관계를 결정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신성이 충만한 것이 곧 상응관계의 유일한 조건입니다.

배익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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