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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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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근묵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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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의 소굴? 기도하는 집?(요2:13-22)

 

요즘 국정교과서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목사님께서 명쾌하게 답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기술하는 책도 네 권이나 됩니다. 마태는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마가는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누가는 종으로서의 예수님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각자가 다른 시각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지만 누구도 여기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더 풍성하게 알아가는 차원으로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사도 그렇게 기록되고 이해하는 것이 옳은 방법입니다.’ 당연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만이 옳고 최선이라는 것은 오만이고 독선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에 대한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천지창조의 칠일간의 과정을 통하여, 출25장에서 31장까지 성막을 세우시는 일곱 단계를 통하여, 그리고 요한복음의 칠일간의 기록을 통하여 오해 하지 않고 더욱 분명하게 알아 가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요한은 셋째 날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2장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면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축제와 기쁨이 충만한 세상임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창조의 셋째 날의 성취입니다. 창조의 셋째 날은 물속에서 땅을 드러나게 하시고 그 위에 온갖 채소와 곡식과 과일나무를 나게 하시므로 이 세상에 풍요와 축제, 기쁨이 충만한 세계를 만드신 날입니다. 그런데 이 축제와 기쁨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성전에 올라가셨을 때 거기엔 성전은 없고 강도들의 소굴만 있었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므로 주께서 세우신 기쁨과 축제가 사라지고 만 것이지요. 주님은 분노하셨고 “내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거늘 너희들은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고 하시며 그들을 몰아내신 것입니다.

주님은 왜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남의 것을 빼앗아 내 것을 채우는 것,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내 생명을 지키는 것, 더 나아가서는 남을 짓밟아서라도 자신만이 살겠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최고가 되어라, 일등을 해라,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 어디까지 하나님의 보좌까지... 이것이 바로 바벨탑입니다. 세상의 원리는 바벨탑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바벨론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장차 무너져 버릴 장망성이지요.(계18장) 그런데 이 세상의 원리가 성전을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거기에 분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집이란 무엇일까요? 기도의 근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거기에 인간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먼저 말씀하셨고, 아담은 거기에 응답하며 살아갔고 거기엔 기쁨과 축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아버지를 찾아 가 말씀을 듣고, 거기에 응답하며 하루를 기쁨 가운데 마치 축제처럼 사셨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예수님의 기도생활로 표현합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응답하며 살아갈 때 거기에는 기쁨과 축제가 충만한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덴의 삶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깨지면서부터 인간의 모든 불행은 시작된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새로운 성전을 세우리라. 주님은 자신의 몸으로 그 성전을 헐고 참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강도의 소굴이 무너졌을 때 거기엔 맹인과 저는 자들이 나와 축제의 삶을 회복했습니다. 당신이 주님 안에서 강도의 소굴로 변한 자신의 성전을 헐고, 주님의 참 성전을 세울 때 기쁨과 축제가 회복될 것입니다.

 

임근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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