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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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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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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18.>

옥수수 유감

 

옥수수를 생각하면 가난한 시대의 배고품이 떠오른다. 6·25사변 이후에 굶주린 배를 채워준 것은 구호물자로 들어온 옥수수였다. 독특한 냄새가 힘들었지만 구수한 것이 기억에 각인돼있다. 그러나 특별한 요리방법이 없이 죽을 끓여먹는 정도였으니 한 두 끼면 모를까 계속해서 옥수수 죽을 먹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마저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얼마나 가난했던가.

게다가 지금 생각하면 옥수수가 미국에서 한국까지 오는 동안 어떤 운송수단으로 왔을까? 그리고 그 과정은 과연 얼마나 위생적이었을까? 이런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먹을 수 없는 수준의 옥수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모든 학생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피난민이나 극빈자로 분류된 아이들만 먹었을 수 있었다. 학교에는 취사장이 별도로 있거나 위생적인 시설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운동장 한 구석에 가마솥을 걸고 소사아저씨가 장작을 때서 물만 붙고 대충 끓여내는 것이었다. 당연히 반찬이 있을 리 없다. 빈 도시락에 죽 한 주걱을 받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면 그만이다. 뭔가 먹긴 먹었는데 배는 부르지 않았던 기억이다.

그런데 요즘은 옥수수도 맛을 따진다. 맛없는 옥수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한 철에만 먹을 수 있었던 것을 냉동보관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철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래도 7~8월 가장 맛이 좋을 때 한 번 먹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러 사거나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마 어렸을 때 추억이 있으면서도 먹고 싶은 것은 아니었기에 추억의 음식 정도로 남겨졌기 때문이 아닐까.

 

저녁 늦게 전화벨이 울렸다. 영흥도에 사는 한 지인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한 터였는데 연락도 못했기에 반가웠다. ‘웬 일로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셨는지요?’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먼저 물었다. “건강이야 뭐 늘 그렇지요. 지난봄에 수술을 또 했어요. 날씨가 좀 선선해지면 항암치료를 다시 해야 하구요.” 그는 암수술을 네 차례나 한 처지다. 몸이 좀 회복이 되면 항암치료를 또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웬일로 ···?’ “목사님! 밭에 옥수수를 심었는데 오는 사람마다 팔라고 해서 그냥 오늘 아침에 다 땄어요. 주변 사람들과 나눠먹으려고요. 미리 돈을 주고 간 사람도 있는데 그건 할 수 없고. 나머지는 나눠먹고 싶어서요. 목사님 생각이 나서 목사님 몫도 남겼는데 내일 갔다드릴게요.”

그리고 다음날 그는 사람을 시켜서 우리 집까지 옥수수를 갖다 주었다. 저녁에 집에 들어가니 이미 옥수는 삶아져있었다. 반도막을 잘라서 옥수수를 입에 넣었다. 차진 것이 맛이 괜찮았다. 옥수수 알갱이를 씹자니 어렸을 때 추억이 되살아났다. 옥수수조차 실컷 먹을 수 없었을 때 잘 생긴 옥수수자루는 탐이 날 정도였다. 구수한 옥수수 특유의 맛은 추억을 깨웠다. 잊을 수 없도록 본성에 각인된 맛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나 분명히 특별한 맛이 내게 기쁨을 더하게 했다.

그것은 단순히 옥수수 맛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이 생기든, 바다에서 무엇을 잡든 기억하고 챙기는 그 사람이 만들어준 것이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그는 가끔 내게 감동과 함께 사람이 사는 기쁨을 느끼게 해준다. 고향친구도 아니고 그냥 이웃에서 잠시 살았던 그이지만 잊지 않고 잊을만하면 한 번씩 연락이 온다. 가장 가까운 사람보다도 때로는 더 가까운 사람인 것처럼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옥수수를 입에 넣고 곱씹으면서 그의 전화 목소리를 되새긴다. “목사님! 언제 한번 오세요. 식사라도 같이 하게! 저는 먼저 살던 곳에서 이사는 했는데 그 근처니까 연락주시고 오세요.” 오늘 옥수수가 맛이 있는 것은 그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는 내게 옥수수 맛처럼 늘 구수하면서도 잊을 수 없는 존재로 다가온다. 그렇다고 특별한 사람은 아니지만 잊을 수 없는, 그래서 더 풍요로운 삶을 만들어주는 옥수수 같은 사람이다.

결코 고급스럽지도, 그렇다고 잘났다고 나댈만한 처지도 아니지만 그는 내게 사람이 사는 것을 느끼게 한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일러준다. 비록 멋스러운 모습이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생각에 잠기게 하고, 옛 생각을 되살리게 한다. 모양도 치장도 하지 않아 거친 모습이지만 입에 넣는 순간 추억을 먹게 하고 구수한 옛 생각들을 떠올리게 한다. 근사한 곳에서 근사한 차림으로 먹을 것은 아니지만 잊을 수 없는 맛이기에 때가 되면 그 맛을 그리워하게 하는 옥수수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를 생각하게 되면 언제나 행복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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