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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속세상ㅣ신록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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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종전 교수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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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깊어가는 날이면 화사했던 꽃들이 하나씩 잎을 떨군다. 이른 봄날 산야를 아름답게 만들었던 꽃들이 자취를 감출 즈음이면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게 되고, 아카시아 꽃이 만발할 즈음 찔레꽃이 한껏 멋을 낸다. 그 다음은 여름이 온다.

그때까지 한반도의 산야는 신록의 아름다움이 넘쳐난다. 매일 아침 새롭게 만나게 되는 산야는 그야말로 어제와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만들어 놓는다. 뭉뚱그려 초록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너무나 미안할 만큼 초록의 다양함이 있다.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말’의 한계가 미안한 마음을 더한다. 겨우 ‘초록’ ‘연두’와 같은 단어를 어떻게든 활용할 수밖에 없는 표현의 한계를 고백해야 할 뿐이다.

그러한 한계를 알고 있지만 봄날이 만들어주는 산야의 정경을 신록(新綠)이라는 말로 담는다. 이 한 마디의 단어를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과 느낌은 어떤 것일까? 긴 겨울의 동면(冬眠)에서 깨어난 초목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노라면 아름답기 그지없다. 초록이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그 초록이 그렇게도 다양한 것은 봄날 산야를 통해서 깨닫게 된다. 그 느낌을 다 표현할 길이 없으니 뭉뚱그려 다시 신록이라 한 것이 아닐까.

인간이 표현하는 신록이라는 말은 봄날의 아름다움을 담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지만 여전히 한계를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인가. 봄날의 아름다움을 다 담을 길이 없어 벅차기만 한 것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조차 다하지 못하는 한계를 절감하면서 맞는 봄날은 차라리 미안한 마음이다. 아니 이렇게 아름다운 날을 만들어준 창조자에게 송구한 마음이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만큼 표현도 못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마음에 담지도 못한다면 그것은 창조자에 대한 결례가 아닐까. 더욱이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조차 이 아름다운 봄날을 그냥 지나친다면 과연 그 믿음은 어떤 것일까. 이것은 창조의 주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선물인데 말이다. 그저 매년 봄이 오는 날이며 잎과 꽃이 피어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가 보면 다시 신록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검푸름이 지배하는 산야가 될 것이다. 그 즈음이 되면 산야를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없어진다.

 

하니 봄날이 다 가기 전에 산야에서 초목이 만들어주는 아름다움과 그들의 생명력을 마음껏 담고 누릴 수 있는 것은 창조를 믿는 사람들의 특권이 아닐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주셨다. 그러나 창조를 통해서 인간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것들이 은혜와 선물로 누릴 수 있는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만의 특권이다. 그럼에도 봄날 신록의 아름다움이 어느 시인이 노래하는 정도로 지나친다면 주신 은혜와 선물을 아무런 생각 없이 던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바쁘다는 이유로 무심코 지나는 시간은 어느덧 오월이다. 흔히들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아름답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계절 중에서도 오월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역시 신록과 관련이 있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점점 여름이 빨라지고 비례해서 봄이 짧아진다는 느낌이 들지만 여전히 오월은 계절에 있어서 여왕이라고 하기에 넉넉하다. 신록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아카시아 꽃이 핀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여름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다. 오월 중순이면 아카시아 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때 즈음이면 신록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니 오월을 맞는 지금이 신록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적기 일 것이다. 매년 봄이면 당연히 볼 수 있는 것들로 지나치지 말고 새로운 생명들이 만들어주는 아름답고 벅찬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것이 창조를 믿는 사람들이 봄날에 감당해야 할 신앙적인 도리일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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