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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여백ㅣ정찬성 목사의 토요일에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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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찬성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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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권사님, 어제 제 육신의 아버지 정헌채 원로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일곱 시에 저녁을 잡수시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오신 작업복 차림입니다. 아주 약간 허리가 굽기 시작한 팔순의 현역 농부 아버지십니다.

들에서 들어오시면 으레 씻으시고 식탁에 오시기에 저희는 아버지가 오길 기다렸습니다. 또 다른 팔순 노인 제 어머니 박순희 권사는 구부러진 허리로 남편 저녁을 챙기고 우리가 가면 붙잡고 네 식구 식사에 흡족해하시는 분위기입니다.

“오늘 뭘 하셨어요?” 제 물음에 동문서답이십니다.“해가 너무 길어 피곤하다.”어머니는 “웬수같은 놈의 풀”이란 대답이 각각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선문답(禪門答)같은 대답인데 비해서 제 어머니는 오늘 종일 논밭전지 다니시면서 풀과의 전쟁을 치루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대답이 구체적이십니다.

돼지고기를 썰어 넣은 묵은 김치찌개와 오징어 달래무침, 파김치, 깍두기, 달걀찜, 멸치볶음에 아들 며느리가 반찬으로 올랐습니다.

내일모래 육십을 바라보는 아들의 방문에 마냥 신나신 어머니를 삐딱하게 쳐다보시면서 놀리시는 아버지의 짓궂은 모습이 정겹습니다.

해가 너무 길어서 피곤하다는 말씀에 낮잠 한잠 주무시라는 조언은 금방 뭉개집니다. “농사철인데 잘 수 있냐!”는 대꿉니다.

언제나 기상시간 네 시 이십분은 바꿀 수 없는 불변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새벽기도회에 다녀오셔서 벌통에서 머물다 아침을 잡수시고는 종일 현역농사일로 논밭전지를 심방하시느라 분주하십니다. 틈틈이 화도면 주민자치위원으로 불려 가시고, 강화군새마을문고 일로, 양봉하는 사람들 모임, 원로장로회 모임 등등으로 여전히 바쁘기 한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십 현역농사꾼이신 제 아버지는 금년에 “관리기”를 새로 장만하셨습니다. 농업용 관리기는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필수품이다. 밭갈기, 비닐 피복씨우기, 이랑 나누기, 농약주기, 운반하기, 풀밭제거 등 각기 그 역할에 따라서 간단한 기구만 관리기에 부착하면 농사 종합선물세트 역할을 하는 농기계입니다.

새로 장만하신 관리기는 금년에도 정헌채 장로님과 함께할 농사의 동반자라서 경운기가 들어가는 창고에 관리기 자리를 따로 마련할 정도로 애정이 남다르십니다. 하긴 가끔 들여다보고 ‘감 나와라, 배 나와라, 이제 농사 그만 지어라, 말아라, 농사일을 줄여라, 이제 건강생각해라 등등 세상 효도는 혼자 다 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소용없는 일입니다.

가끔 저에게 정목사 오늘 시간이 어떻게 되냐고 물으시고 어머니 병원 가는 날인데 시간 되면 모시고 가도록 부탁하는 의젓한 남편 노릇이 돋보이는 어른이십니다.

물론 당신일로 저에게 차편 부탁하기 위해서 전화하신 적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요즘은 ‘못자리 흙 담기’가 한창입니다. 감자 심기는 벌써 끝났습니다.

아랫밭 비닐하우스에 심은 쌈 채소를 뜯기가 시작되었고, 얼갈이 배추, 도마도, 오이는 한창 자라고 있습니다. 윗밭 비닐하우스에 심은 고춧모는 이미 포트에 옮겨 심어 얼마 안 있어 단골들에게 필요한 만큼씩 공급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팔다 남은 고추모 천여 주는 당신 밭에 심습니다.

유권사님, 이렇게 많은 일을 쉬지도 않고 하시니 피곤하시지 않겠습니까? 피곤하시다는 말을 “요즘은 해가 너무 길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유권사님, 낮이 길어 피곤하시지만 그래도 건강하셔서 감사한 겁니다.

제 어머니 박순희 권사님은 땅 풀리고 지금까지 천여평 집 주변을 유리알처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웬수 같은 놈의 풀들”이라고 풀의 성격을 규명한 후 전쟁을 선포하시고 보름이 훨씬 지나서야 일차 대단원의 막을 내리신 겁니다.

집 주변에는 그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당신의 밭이 있습니다. 집터 주변에는 잡초가 자랄 틈이 없습니다. 달래, 더덕, 오가피, 부추, 매실, 장중과 단감, 복숭아, 모과, 자두 등이 집 경계를 따라 땅과 과일영역 공간에 그득합니다.

80세가 넘은 어머니가 풀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치루며 ‘원수놈의 풀들’이란 표현이 참 적절합니다.

유권사님, 해가 너무 길다는 아버지, 원수놈의 풀들이란 표현을 가리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관리기를 사셔서 자식들에게 일용할 양식과 부식을 책임지시는 아버지와 각종 나물과 야채, 생선으로 별미를 만드시고 강권하여 당신 집을 방문하게 하시는 어머니의 사랑에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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