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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과 차별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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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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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요구들이 당연한 것으로 부각되는 일들이 심심치 않다. 그만큼 우리 사회도 의식이 깨고, 성숙해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개인의 소리가 공적으로 들려지게 된다는 것은 분명히 많은 변화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되고, 국민의식이 성숙해지면서 사회적 요구들도 다양해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중에도 인권, 차별, 소수자 문제 등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러한 소리들이 왠지 우리에게는 먼 이야기처럼 들렸는데 이젠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소리니 말이다.
그래선지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지는 소리가 “평등”이라는 말이다. 평등이라는 말은 인권과 관련해서, 혹은 차별과 관련해서 가장 많이 쓰인다. 그만큼 사회적 불균형과 사람들 사이에도 차별문제가 있다는 것이리라. 그래서 요즘은 무엇을 하든지 제일 먼저 “평등권”이 담보되는가에 대해서 관심이 높다. 직업별, 성별, 신분별, 출신별 각각의 집단이나 개인이 평등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곧 우리 사회도 많이 성숙해지고 있다는 의미이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가 이 일에 앞선 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에 대한 관심이나 의식이 사회적 의식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부정할 수 없다. 그만큼 무관심하고, 무지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가지고 있어야 하는 선각자적인 본분이다. 성경의 가르침 역시 소수자나 약자에 대한 배려가 일관되다. 그럼에도 한국교회가 이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이며, 시대적 책임을 의식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모습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회적 요구에 대한 성경적 대답을 깊이 깨쳐서 신앙으로 응답하여 그 책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사명이며 본분이라는 생각이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분으로서 역할을 의식하고 각각의 차별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교회가 감당해야 한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섬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동시에 생각해야 할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평등이라는 말에 담긴 또 다른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평등은 필연적으로 차별의 문제를 해소하는 의식이고 제도를 낳게 한다. 그러므로 평등을 요구하는 하는 것은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차별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서는 모순에 빠지거나 왜곡된 결과를 낳게 함으로써 오히려 심각한 문제를 동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즉 평등과 질서, 혹은 평등과 본질적 구별에 대한 이해와 헤아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평등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창조질서를 부정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은 평등에 대한 의해와 적용의 왜곡이다. 그 결과는 무질서에 의한 인간 파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 예를 들어서 남자와 여자는 똑 같은 인간이라는 의미에서는 평등이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남자는 남자로서의 본분, 본성, 기능을 가지고 있고 여자도 그렇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평등한 인간으로서 협력과 조화, 존중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뜻을 섬기는 삶을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런데 평등이기 때문에 각각에게 주어진 본분, 본성, 기능을 부정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질서를 부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 결과는 사회적 혼란과 함께 인간에게 주신 아름다움도 잃게 되고 심각한 고통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어떤 것은 남자만, 혹은 여자만이라는 기계적인 책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의 조화, 협력, 존중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섬김으로 살게 하셨고, 그 과정을 통해서 행복을 누리도록 하셨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이러한 관계 안에서 평등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평등이라는 말로 남자와 여자가 우성과 열성을 극복하기 위한 이상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양성의 관계는 우와 열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평등한 인간으로서 신뢰, 존중, 사랑으로 조화와 협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땅에서 섬기는 각각의 다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것을 창조질서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남자와 여자)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을 통해서 창조에 있어서 주신 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 누림 역시 평등이다. 그러나 기능의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차이를 차별이 되게 하거나 서로에게 지배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서로를 섬기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진정한 평등과 행복을 만들어 줄 것이다. 차별과 다름, 비윤리를 구별해야 할 것이나 평등이라는 논리로 비윤리를 허용하는 결과에 이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평등은 어디까지나 창조질서를 존중하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그 질서를 부정하면서 평등을 말한다면 그것은 평등이라는 논리로 창조질서의 파괴를 자초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표현은 필자가 즐겨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쓰려고 하는 것은 어휘력의 한계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사변적 긴장을 담자는 의도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평등과 차별 사이에서 생각해야 할 것들을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다. 굳이 이러한 표현을 하는 것은 평등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평등이라는 명분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부정하려는 경향이 오히려 심각한 문제를 동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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