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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와 함께 하는 성경여행- 마가복음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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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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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

 

하나님의 명령으로 유월절, 맥추절(칠칠절, 오순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 축제를 지킨 유대교는 원래 잔치하는 종교, 축제의 종교였다. 시편 기자는 공동체를 이루며 잔치하는 그 모습에 도취되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도다”(시133:1-2)라고 노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점점 절기는 의무감으로 바뀌고 형식만 남는 행사로 전락하는 분위기였다. 이때 혜성같이 등장하여 연일 파격적인 행보로 이목을 끄셨던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라”며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하셨다.

 

1) 금식할 때가 아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자주 한 것과 달리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금식은커녕 매일같이 축제를 벌이며 먹고 마셨다. 오죽하면 “…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18)라는 질문을 받을 정도였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공생애 3년 내내 먹고 마신다는 것이다.

 

금식은 애통함과 회개의 표시로 어떤 절실한 간구나 소원이 있을 때 행해졌다. 본래는 대속죄일(yom kippur)에 연 1회 금식하면 되는데(레16:29) 바리새인들은 한 주에 이틀(월, 목요일)을 금식했다고 한다. 대단한 신앙이다. 그러나 자기 부정과 메시야에 대한 그리움, 갈망이 아니라면 그것은 변질된 금식(자기 과시- 눅18:11~12), 위선일 뿐이다.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 40일을 금식하셨다. 그러나 그때 외에는 금식은커녕 오히려 세리 죄인들까지 함께 모여 즐기는 잔치의 연속이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변론(19절)인데 예수님은 잔치 중의 잔치인 결혼 잔치에서 하객들은 신랑과 함께 기뻐하며 배불리 먹는 것이 당연하지 금식하며 우거지상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하셨다.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2) 축제를 즐길 때다

예수님은 당신을 기다리던 신랑이 온 것으로 비유하며 결혼식으로 한판 축제를 즐길 때임을 강조하셨다. 이제는 메시아가 오셨다는 말씀이다. 그동안은 종교적 행위로 반복적인 금식을 하며 애통했을지라도 지금은 축제를 즐길 때라는 것, 물론 ‘메시아와 함께’가 핵심이다. 메시아 예수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그곳을 축제의 장이 되게 하셨다. 심지어 떡과 잔으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기억나게 하는 주의 만찬(Lord's Supper)마저도 장차 천국에서 벌어질 ‘메시야 잔치’(Messianic Banquet)를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기쁨과 승리의 축제로 삼았다.

 

이게 바로 기독교의 매력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기쁨! 비록 2천 년 전 승천하셨지만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 기독교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종교 아닌가? 예수님의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첫 번째 표적이나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교회와 예수님의 관계를 혼인잔치로 서술한 것(계19:7)도 기독교는 잔치하는 종교임을 명시(明示)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솟구치는 기쁨으로 예배 때마다 축제를 즐길 만하지 않나?

 

3)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예수님은 당시 가장 고상한 종교였던 유대교의 성취(fulfillment), 능가(supersession), 대치(replacement)자로 오셨다. 새 시대를 여신 것이다. 이제 형식과 과시적으로 섬기던 시절은 끝났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다”(21절)고 하셨다. 이는 낡은 옷이며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은 유대교의 율법 공동체가 아니라 발효력이 강력한 예수 공동체, 즉 주님과 함께 하는 참 신앙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어울리지 않는 것을 억지로 붙이지 말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그런데 유대교라는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었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기독교 또한 낡은 가죽부대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께서 의인인 체하는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선민과 특권의식으로만 가득한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둥지를 트신 것을 보며 교회는 반드시 부글부글 끓는 말씀의 발효력을 능히 감당할 만한 새 부대가 되어야 한다.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새 시대에 합당한 삶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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