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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와 함께 하는 성경여행- 마가복음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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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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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14절). 마가는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세관에 오신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follow me)는 단 한 마디의 말씀에 레위가 즉각 일어나 따른 것으로 묘사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 그가 바로 마태복음서를 기록한 마태였는데(마9:9) 단 한 절의 만남이 그 날 만남의 전부였다.

 

그런데 앞부분의 중풍병자와의 만남 분량(12절)과 비교하면 분량이 너무 짧다. 복음서 기록자들의 자기 이야기는 베드로, 요한, 안드레, 야고보 등 다른 제자들보다 더 지나칠 정도로 짧다. 마태는 알패오의 아들이 자신이었고, 직업이 세리(publican)였다는 사실을 살짝 얹은 것 외에는 자신이 기록자였다는 그 어떤 힌트도 남기지 않았고, 요한도 자신을 “주님의 사랑받는 자”(요19:26)라고만 소개했다. 마가 역시 예수께서 체포당하실 때 예수를 따르다 벗은 몸으로 달아난 청년(막14:51)이 자신이었음을 추측케 한 것 외에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3층천까지 체험하고도 마치 제3자의 영적체험처럼 소개한 바울의 간증(고후12:2)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비록 단 한 구절의 짧은 만남이어도 이 만남을 보며 자신을 돌아보기 바란다.

 

1) 예수께서 먼저 다가오신다

 

예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바닷가에 온 동네 사람이 다 나가도 마태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공공의 적’과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선망의 직종인 세무공무원인 세리는 당시 한 마디로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사람들에게 세금 징수의 권한이 있던 로마 총독이 직접세는 관리들을 통해 거둔 반면, 간접세나 관세는 세리들에게 하청을 주어 징수했는데 세리는 동족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게 바치는 것은 물론 별도의 급료가 없었기에 규정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착복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를 로마의 앞잡이, 합법을 위장한 강도 취급을 하며 극도로 경멸하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미움 섞인 따가운 시선을 받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세관에 남아 진한 외로움을 느끼는 그 마태를 예수께서 사랑이 가득 담긴 따스한 눈길로 보시면서 반전(反轉)이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의 갈증을 아셨다. 이름이 레위라면 제사장 지파, 이름값도 못하는 그를 예수님이 먼저 직접 찾아주신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만남이었지만 이 만남이 그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인 만남이 되었다.

 

2)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세관 앞으로 다가오실 때까지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장부만 만지작대던 마태, 느낌이 왔을까? 고개를 슬쩍 들었는데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따르라”(14), 예수님의 자신을 향한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에 계산이 빠른 세리였지만 두 말 않고 따랐다.

 

마태의 이 결단은 다른 어떤 제자의 결단보다 더 위대하다. 베드로나 요한이 배와 그물을 버리고 따랐어도 그 배와 그물이 가족의 소유로 남은 것에 비해 마태는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자기 직업을 완전히 포기한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마태라는 이름을 역사에 남긴 선택이 되었고, 세리들의 수호성인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위대한 선택이었다. 만약 그날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그냥 세관에 앉아 있었다면 마태는 평생 그늘진 세관에서 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이름값도 못하는 부끄러운 사람,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3)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신다

 

얼마나 좋았을까? 마가는 마태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고 했다. 세리 친구들이 참석했다. 성경은 그들이 죄인이라 불리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죄인과 세리’라는 표현이 15절과 16절에서 3번이나 나올 정도로 유대인이 어울려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바리새인들은 즉각 문제 삼았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님이 공공연히 율법을 범하고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에 견딜 수 없었던 바리새인들(구별되었다는 뜻)이 문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7절)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다. 예수님은 돈만 알던 세리를 위대한 신학자로 변화시키셨다. 마태는 무려 29회에 걸쳐 구약을 인용하며 예수님이 그 말씀의 성취자가 되셨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부르실 때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즉각 따르며 특별히 왕따들의 친구로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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