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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와 함께 하는 성경여행 - 마가복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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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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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

 

사역 초기의 중심지였던 가버나움을 벗어나 갈릴리 전역에서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 앞에 절망감과 수치심과 외로움으로 살던 한 나병환자가 다가왔다. 그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긍휼로 고침을 받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에게는 운명을 바꾸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시간이 되었다. 살길을 찾은 것이다. 뜨거운 감동이었던 그 만남의 현장을 보며 예수님과의 만남이 얼마나 큰 복이 되는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1)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요즘은 한센 병이라고 하는 나병은 당시 천형, 곧 하늘이 내린 벌로 여겨졌던 병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마치 AIDS와 같은 불치병, 전염성 때문에 이 병에 걸리면 즉시 사람들과 격리되었다. 사회적으로 죽은 것과 같은 단절, 그래서 신경이 무뎌지고 살이 썩고 손가락과 발가락 등 신체부위들이 떨어져나가다가 결국 죽는 것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지만 사회적인 고립은 더 힘든 고통이었다. 성경에 의하면 자신의 옷을 찢으며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unclean! unclean!)하고 외쳐야 했다(레13:45). 부정한 사람이라 성에 들어올 수도 없었다.

그렇게 단절되었던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 꿇어 엎드렸다. 버림받은 더러운 존재요,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는 존재라는 자괴감을 이기고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간구했다. 생명을 건 필사적인 결단이었다. ‘원하시면’(if you are willing), 불신앙이 아니다. 전적으로 예수님 뜻에 달려 있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그래서 하나님 원망도 하고, 자신의 운명을 탓하기도 하고,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는 여느 나병환자들과 달리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나아왔다. 닫힌 마음 문이 열리고, 진리의 눈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는 ‘고쳐 달라’가 아니라 ‘깨끗하게 해달라’(make me clean)고 했다. 엉망이 된 피부뿐만 아니라 영적 더러움을 깨끗이 씻고 싶었던 모양이다. 본문에서는 ‘깨끗케 하다’는 동사가 반복된다(40,41,42,44절). 그의 간구일 뿐일까? 그 나병환자와 같이 단절된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의 간구이기도 하다.

 

2)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예수님은 믿음으로 간구하는 나병환자를 사랑으로 치유하신다. 말씀 한마디로 능히 고치실 수 있지만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41절, touched the man), 고름이 흐르고 다 문드러진 피부를 친히 만지셨다. 사랑의 터치였다. 아마 그 동안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이 사랑의 터치는 바로 앞 구절의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라는 말씀 때문이다. ‘불쌍히 여겼다’는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 명사형 ‘스플랑크논’(splavgcnon)이 ‘내장, 창자’란 뜻이니 창자가 뒤틀릴 정도의 애끓는 마음이 발동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원래의 행복을 잃고 고통 가운데 살고 있는 그 사람의 모습에 견딜 수 없으셨던 것이다.

『성 프란치스꼬의 잔 꽃송이』라는 책을 보면 성 프란치스꼬(San Francesoc)와 그의 수도단들은 나병환자를 자주 돌보았는데 성미가 고약하여 간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불평을 터뜨리던 한 나병환자의 그 더럽고 냄새나는 몸을 직접 두 손으로 정성껏 씻어주다가 놀라운 경헙한다. 프란치스꼬의 손이 닿는 곳마다 상처가 낫고 피부가 깨끗해졌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사랑의 터치가 우리를 살린다.

 

3)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I’m willing, Be clean!”(41절),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나병환자가 깨끗하여졌다(cured). 얽어매고 있던 모든 속박과 부정함의 굴레들이 벗겨졌다. 예수님의 말씀이 능력이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권위가 바로 이 말씀의 권위다. 교회의 권위는 물질이나 숫자가 아니라 말씀에 있다. 말씀의 권위가 없으면 자꾸 다른 권위를 이용하려고 한다. 성경을 보면 말씀이 창조의 수단이자 부활의 수단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엄청난 일을 하신 예수께서 메시아로 오신 목적,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이 왜곡될 것을 염려하여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44절)라며 엄히 경고하셨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발설하지 못하도록 억누를수록 소문은 더 퍼지는 법, 마가는 그가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전한다(45절). 굳이 소문내려 하지 않아도 소문 날 특종, 언론마다 대서특필(大書特筆)할만한 일이었다. 교회도 이런 모습, 소문을 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소개할 수 있는 상품이 기가 막히도록 좋다면 소문은 날 수밖에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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