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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와 함께 하는 성경여행- 마가복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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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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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Capernaum)으로 가셨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쪽에 위치한 해안마을, 예수님 초기사역의 중심지였다. 나사렛에서 성장하셨지만 초기사역 대부분이 가버나움에서 이루어진 것을 보면 예수님도 가버나움 주민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 일행을 보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깔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회당(synagogue)을 찾아가 말씀을 가르치시면서 큰 반향이 일어났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랐다”(22절)고 했다. 귀신을 쫓아내고 귀신들렸던 사람을 온전하게 하셨을 때는 그들이 “다 놀랐다”(27절)고 했다. 말씀의 권위에 압도당하고, 마음이 찔린 그들은 서기관들(scribes)의 가르침과는 차원이 다른 “권세 있는 새 교훈”(new doctrine, authority commandeth)이라고 평가했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기 때문이다.

서기관이 누군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최고로 존경받던 사람들 아닌가?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이 본격화되면서 그들은 늘 그 중심에 있었다. 그들의 말이 곧 법이요, 행동규범이었다. 그래서 모든 모임에서 그들은 언제나 상석에 앉는 사람들이었다.

훗날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말씀을 전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 나타났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행2:37)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행2:43)… 이게 말씀의 위력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설교에 이런 반응이 일어나고 있을까? “우리가 어찌할꼬?”(What shall we do?)라는 반응이 없는, 삶과는 관련되지 않는 말씀이 선포되고 있다면 그건 강단의 위기다. 현대의 설교가 ‘권세 있는 새 교훈’이 아니라 ‘아무런 권세도 없는 옛 교훈’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평가가 따르고 있다. 권세 있는 새 교훈을 회복하기 바란다.

 

1) 지식적으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귀신이었다(24절). 예수님이 기적이나 사역을 행하시기도 전에 귀신은 이미 예수님이 누구신지, 얼마나 능력 있는 분이진지 알아보았다.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서야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제자들과 대조적이다. 모든 것을 아는 귀신이었기에 흔히 잘 알아맞히면 ‘귀신같다’는 표현까지 쓴다. 문제는 귀신이 이런 자신의 지식으로 구원을 이루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서기관들도 그랬다. 613개의 율법 조항과 49개의 안식일 계명을 달달 외우고, 구약과 미쉬나(Mishna)에 해설집인 할라카 (Halakha), 학가다(Haggadah), 탈무드(Talmud)까지 잘 알고 있었으나 그 잘 아는 율법, 그 가르치는 지식으로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하지는 못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의 설교도 지식 전달이 아니다. 가슴을 치고 무릎을 꿇게 해야 한다.

 

2)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다.

그때 회당에는 어울리지 않게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문제였다. 그는 귀신에 들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온갖 탐욕의 더러운 영에 장악되어 있었다(막7:21-23). 서기관들도 마찬가지였기에 예수님은 그들이 겉으로는 깨끗한 척 하지만 그 안에 온갖 욕심과 정욕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셨다(마23:13, 15, 25, 27).

한국교회는 대형화되면서(또는 추구하면서) 교회다움을 잃었다. 겉으로는 사명이며 사랑이요 선교라 외치지만 속으로는 온갖 욕심과 거짓과 폭력과 분열과 아집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시선이다. 이게 능력있는 말씀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다.

 

3) 존재가 달랐다.

못생기고 지식이 모자라도 회장이나 대통령의 말에는 권위가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성철 스님이 말했기에 유명하지 일반 범인이 했다면 “당연한 말을 왜 해?”라는 반응만 따랐을 것이다. 말 자체의 권위보다 존재 자체가 말을 권위 있게 만든다. 서기관들은 귀신들린 사람을 방치했지만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어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25)며 귀신을 내쫓으셨다. 귀신이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에 순종한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다. 본질적으로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롬8:38-39) 대적할 수 없는 DNA를 가진 존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로 자녀답게 살며 권세 있는 가르침을 회복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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