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목회

목회영성이야기 분류

이희우 목사와 함께 하는 성경여행 – 마가복음 2

작성자 정보

  • 연합기독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이희우 목사

 

4복음서는 모두 다 침례 요한의 사역으로부터 시작된다. 마가도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며 ‘주의 길을 준비하는 침례 요한’을 소개했다. 특징은 침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다는 것이다. 광야는 사막, 인적이 없는 곳이다. 주의 길을 예비한다면 예루살렘, 그것도 성전 한 복판이 적합할 것 같은데 의외로 조용한 광야에서 외쳤다. 왜 하필 광야였을까? 도시는 거짓과 욕망이 가득하고, 끝없는 경쟁과 이기심으로 오염되고 부패하여 평화와 안식이 전혀 없었지만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께 훈련받던 정든 곳이었기 때문일까?

그런데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5절), 말라기 이후 400년간의 침묵을 깨고 드디어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뜨거움’이었다. 누가가 언급한 침례 요한 사역 당시의 정치, 종교적인 배경을 보면 이런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다(눅3:1-2). 로마의 통치 아래 그들의 꼭두각시인 에돔인들-헤롯과 그의 친척들-의 학정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은 종교적 탐관오리인 안나스와 가야바라는 한 시대에 두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두는 타락한 종교 상황에 처했고, 종교지도자들의 횡포에 높은 세금까지 더해지면서 지칠 대로 지쳤었다. 이는 곧 메시야에 대한 갈망이 최고조였다는 뜻이다.

한편 구름떼처럼 사람들이 몰려오는 이런 현상은 말씀의 힘 때문이기도 했다. 형식적인 신앙에 식상했던 사람들은 진리의 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허름하고 불편한 곳이라 해도 맛집으로 소문만 나면 사람들이 줄지어 찾아가듯 하나님의 진리가 있는 곳이라면 사막 한 가운데일지라도 찾아간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신8:2-3).

놀랍게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침례 요한의 광야에서의 메시지인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는 물질적으로는 부요해졌지만 영적으로는 오히려 가난해진 한국교회,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은 사라지고 기도의 기쁨과 열정을 잃은 오늘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침례 요한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우리의 역할을 다시 점검해야 할 것이다.

 

1) 심플한(Simple) 사람의 외침

낙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던 그의 모습(6절)은 마치 엘리야 같았다. 낙타털옷은 사막의 추위를 막을 옷이며, 메뚜기와 석청은 건강음식이 아니라 사막에서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식이었다. 포도주나 고기나 곡식을 아예 먹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에게는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말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날로 더해가는 호화로운 교회 건물, 럭셔리한 자동차, 최신식 시설의 수양관이 자랑거리와 부러움의 대상이 된 한국교회, 영성은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 고갈되고 마음은 더 탐욕스러워지고 말았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은 침례 요한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2) 뒤에 오시는 분을 증거하는 소리

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절), 그저 ‘소리’ 같은 존재였다. 자기 얼굴이 없는 소리, 그는 다만 뒤에 오는 주인공을 빛나게 하고 사라지는 존재일 따름이었다는 말이다. 침례 요한은 자기의 정체성(identity)을 잘 알고 그저 자기 역할에만 충실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들 중 가장 큰 자라는 인정까지 받았다.

예수님의 사촌 형님뻘이자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대단한 선지자로 그의 침례는 팔레스틴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친(행18:25, 19:1-4 참조) 그는 자기의 권위나 영광을 주장할 충분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저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능력이 더 많다며 자신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존재라고 했다.

 

3)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라

침례 요한은 자신은 물로 침례를 주는 데 비해 예수님은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분이라 했다.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정결이나 회개의 상징에 불과하지만 성령 침례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든다. 이 성령 침례(1회적)가 성령의 내주(지속적)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요한은 자신이 아니라 성령으로 침례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것을 촉구한다. 그래야 구원이 있고, 그래야 진정한 변화와 성령 충만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그 소리는 우리를 예수께로 인도하는 소리일 뿐이었다. 마지막 시대가 될수록 너도 좋고 나도 좋은 덩달이(?)가 아니라 침례 요한처럼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성도가 되기 바란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