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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노래하다 간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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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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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옥 목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28년의 아쉬웠던 삶이지만 한끝 이름마저 부끄럽다던 괴로웠던 청년, 윤 동주

그는 민족의 비애를 가슴에 안고 살다간 민족 시인이다. 그가 남긴 100여 편의 시는 순수하고 참다운 인간의 본성을 잘 표현하였고 우리들에게 맑고 청순한 영혼을 심어 주었다. 일제의 강점기 억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소망을 누구보다 가슴 깊이 새기고 아까운 나이에 끝내 해방의 새벽을 보지 못하고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인생을 마감하였다.

윤 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명동학교 교원이었던 윤 영석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간도 이주민 3세였다. 함경도에 살던 증조부께서 기근에 시달리며 신앙의 자유를 찾아 간도로 이주했고 1900년에는 장로였던 할아버지 윤 하현에 의해 명동촌으로 이사했다. 비교적 가정이 유복했던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문을 접하면서 신앙적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는 내성적이면서도 의연했고 항상 책 속에 묻혀 창작에 몰두했다.

1932년 그는 용정에 있는 기독교 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고 학교에서 문예지를 만들고 축구선수로 활약하며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하였다. 1934년 「삶과 죽음」, 「초한대」 , 「내일은 없다」 등 작품을 쓰며 시인의 꿈을 꾸었다. 4학년 1학기 때 평양 숭실중학교에 편입하였다. 그는 계속 민족적이고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문학에 심취하며 숭실중학교에 「공상」을 게재하였다. 20세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학교가 폐교되자 용정으로 되돌아와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여 문 익환, 장 준하, 정 일권과 같이 공부했다. 그 무렵 윤 동주의 시는 화려하고 관념적인 세계를 벗어나 누가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소박하고 순수한 표현으로 바뀌었다. 36~37년 사이 활발하게 작품을 냈다. 1938년 연희전문 문과에 합격했다. 그는 최 현배 선생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웠고 정 지용시인의 표현법을 접목하면서 영문과 이 양하 교수에게서 영시도 배웠다. 여름방학 때면 성경학교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가르쳤다.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하였다. 1942년 그는 일본유학을 결정하고 수속을 위해 창씨개명을 한다. 성씨를 「하라누마」 로 바꾸었다. 그 때의 굴욕감을 「참회록」 에 담았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나라 잃은 수줍은 청년 그래도 민족의 얼은 가슴에 살아있기에 유학수속을 위해 창씨개명을 하고 가슴 아린 눈물을 흘린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길이 끝내 죽음의 길이 될 줄 그 누가 알았으리요. 그는 기독교계학교 도시사(同志社) 대학 영문과에 다니던 1943년 1월 14일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었다. 얼마나 아쉬운가

참회록을 쓰면서까지 유학 온지 불과 1년 남짓밖에 안되었는데... 1944년 1월 19일 교토지방재판장은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독립운동) 혐의로 징역 2년을 언도하며 “윤 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의 감화에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일본에 깊은 원망을 품고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하는 활동을 했다.”고 기록하였다.

이렇게 윤 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고 만 1년 만에 순국의 길을 가고 말았던 것이다. 장례식은 용정중앙감리교회에서 문 재진 목사의 집례로 치러졌으며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윤 동주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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