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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여행 - 이희우 목사와 함께 엘리야를 따라가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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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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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

 

나봇이 죽었다는 사실을 안 아합이 그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움직이자 하나님께서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셨다. 드디어 아합의 심판을 결정하신 것이다. 그 심판을 통보하기 위해 엘리야를 보내신 곳이 바로 사마리아(Samaria, 예루살렘 북쪽 약 68km 지점)였다.

 

1) 하나님의 심판이 결정되다

그 동안 아합의 악행에 가뭄과 바알 선지자들 몰살 등으로 경고만 하고, 직접적인 심판은 자제하던 하나님께서 드디어 심판을 결정하셨다. 겉보기로는 극히 작은, 한 사람의 불의한 죽음사건이지만 이 사건이 임계점(critical point)을 넘는 결정적인 악행이 되고 말았다. 아합 왕조가 망하는 것과 관련한 기록 때마다 언급된 것을 보면 하나님은 이 사건을 크게 보신 것이다.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19절), “네가…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버리되…”(20-21절) 엘리야를 통해 내리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메시지다. 결국 말씀대로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자신의 병거에서 활에 맞아 죽었으며,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다(왕상22:38). 성경은 그 곳을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다’며 아합의 죽음을 모욕적인 죽음으로 부각시켰다.

2) 변명의 여지가 있다고?

22년 동안 왕위에 있었던 아합, 지금까지는 ‘경고의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심판의 대상’이 된다. 물론 아합에게도 나름 변명의 여지는 있었다. 여호와의 선지자를 죽이고 바알과 아세라 신앙 확대를 주도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이세벨이었다. 그래서 성경도 이세벨의 충동을 언급했지만 아합이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다고도 했다(25절). 부부 연대책임? 아합 입장에서는 나라를 위해 강력한 이웃 국가의 이세벨과 정략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었다.

아합에게 일말의 신앙양심도 있었다. 지명수배자였던 엘리야를 만나고도 죽이지 않고 갈멜산 영적대결을 허락했고, 아람의 벤하닷과 싸울 때에는 하나님의 사람인 한 선지자의 도움을 받아 싸움에서 승리하며 여호와를 무시하는 아람 왕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위대함을 드러내기도 했다(20장). 또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자신이 아니라 이세벨이 주도한 일이며, 사실 남들은 국왕이 필요로 한다면 그냥이라도 주겠다고 안달인데 충분한 보상을 제안해도 팔지 않겠다고 극구 우긴 것과 왕의 체면 따윈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굴러온 복을 찬 것도 나봇이라고 할만도 하다. 충분히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 일리가 심판을 피하게 할 수는 없었다.

3) 재앙이 연기되다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21-24절), 강력한 의지를 담은 심판통보, 이에 아합은 납작 엎드렸다.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27). 효과가 있었다. 아합이 당신이 좋아하시는 겸비한 태도를 보이자 하나님은 아합 때가 아니라 그 아들 요람 때로 재앙을 미루셨다(29절).

물론 엘리야가 전한 심판통보대로 아합의 아들 요람 때 예후 혁명에 의해 아합의 오므리 왕조는 끝장이 나고, 살해당한 요람 왕의 시체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져진다(왕하9:25). 또 아합의 아들 왕자 칠십 명은 한꺼번에 머리가 잘려 성문 밖에 버려져 개나 새들의 먹이가 되고, 요람 때까지 살았던 이세벨도 높은 이스르엘 왕궁에서 던져져 죽임을 당한다. 개들이 그 시신을 먹어 일부만 찾을 수 있었을 정도(왕하9:36-37)니 연기는 됐어도 끔찍하다.

이때의 심판 탓일까?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공교롭게도 사마리아는 BC 721년경 아시리아(Assyria)에 의해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했을 때 많은 주민들은 추방되고, 시리아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이민족들이 정착하면서 그들과 피가 섞인 혼합 인종이 되었으며, 신앙도 혼합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 후 사마리아는 차례로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는 서로 반목하며 접촉하지도 못했고,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은 유대인들 사이에 경멸의 용어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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