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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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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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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전 교수

 

녀석들이 부화한지 이제 세 주간 째이다. 날 수로 하면 16일이 됐다. 어미의 철통같은 경계경비 때문에 다른 성계(成鷄)들의 접근은 완벽하게 차단되어 녀석들은 자유롭다. 자신의 위치가 확인할 수 있도록 소리만 내면 된다. 어미는 깃털을 부풀려서 자신이 경계를 서고 있으니 누구도 병아리들에게 다가오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니 철없는 병아리들은 온통 자기들 판이다. 아예 먹이통에 들어가서 헤집  으면서 난장판을 만든다. 성계들일지라도 병아리들이 먹이통에서 나와 마당으로 나가야 비로소 어미닭의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먹이통으로 다가간다.

계사(鷄舍)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닭들이 살고 있는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봄날 끝자락에 포란을 시작해서 늦게 병아리를 부화시킨 어미 닭은 새끼들을 기르느라 여념이 없다. 다른 성계들과 합사시켰기 때문에 어미의 경계는 매우 예민하고 민첩하다. 한 계사에 성계들과 병아리들이 살고 있으니 아마 어미는 스트레스가 여간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더 긴장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계사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목청을 높이고 있는 막내로 태어난 병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어미가 마당으로 나가면 다른 병아리들은 문턱을 뛰어넘어 어미를 따른다. 한데 녀석은 문턱을 뛰어넘지 못하고 어미에게 자신이 위기에 처해있다는 듯 고성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다. 두려운 마음에 목을 길게 뺀 채 까치발을 하고 자기가 위험하다고 소리를 친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문턱을 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문턱을 넘기 위해서 모둠발 뛰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문턱에 머리만 찢고 나뒹굴러 떨어진다. 이내 일어서서 다시 삐악거린다. 이번엔 불안을 느꼈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다급한 목청을 돋운다.

그런데 16일째 되는 오늘 그 막내가 비로소 문턱을 넘었다. 문턱을 넘기 위해서 얼마나 머리를 부딪히고 굴렀는가? 하루에도 수도 없이 넘어지며 나뒹굴었다. 그랬던 막내가 마당에 나와 있는 것이다. 녀석을 보는 순간 대견했다. 문턱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막내로 태어나 먼저 태어난 형제들을 따라다니려니 힘에 겨웠던 것인데, 비로소 오늘 문턱을 넘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두려움이 앞서는 게다.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여러 차례 망설이는 것이 보인다. 고개를 길게 빼고 어느 쪽에서 점프를 해야 할지. 망설이기를 여러 번 하다가 점프를 한다. 하지만 문턱에 걸려 다시 안으로 굴러떨어진다. 다시 일어나서 이쪽저쪽을 왔다갔다를 반복하다가 다시 점프한다.

몇 번인가 그러한 시행착오를 하더니 이제는 자신감을 가지고 문턱 앞에서 점프를 한다. 그리고는 형제들이 있는 마당으로 내달린다. 어미는 그 과정에서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가끔 고개를 들고 울고 있는 막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볼 뿐 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는 막내도 거침없이 어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한 생명이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을 본다. 그 과정에서 한 개체로 자라기까지 어미의 역할과 교육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미는 새끼가 무엇이 필요하고, 어떤 상태에 있는지 살핀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면 쏜살같이 달려들어 주변의 성계들 내쫓는다. 먹을 것이 있으면 병아리들을 불러모은다. 병아리들에게 일일이 먹이를 물어다 주기도 한다. 애틋한 어미의 모정을 보면서 인간됨의 무한책임을 느낀다.

미물의 짐승도 새끼를 기르는 과정에서 자기 책임을 다하는데... 그리고 한 생명이 성장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을 보면서 인간에게 주신 능력을 얼마나 개발하고 사용하고 있는지를 자신에게 그 책임을 묻게 된다. 저절로 자라거나, 저절로 어느 날 성계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인간도 어느 날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장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수업과 훈련을 해야 한다. 그 과정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인간됨에 이를 수 없는 일이다. 특별히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수업과정이 길고 많은 경비도 들어간다. 단순히 생존을 위한 기능만 익혀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됨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습의 범위가 넓어야 한다. 또한 자신만을 위한 능력을 익히는 것으로 인간됨을 완성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위한 자신의 능력도 함양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사람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무시되거나 생략되는 것이 많은 것 같다. 아니, 그러한 수고도 없이 살려고 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캥거루족이라는 말이 들리더니 이젠 신캥거루족(결혼한 후에도 부모와 함께 살면서 자기 책임을 감당하지 않는)까지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단순히 사회적인 문제로만 치부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 어진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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