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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와 떠나는 성경여행 – 요한복음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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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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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

예수님은 해변에 숯불과 생선과 떡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메뉴는 군침 도는 생선구이, 빈손으로 돌아오는 제자들에게 한 마디 말씀으로 밤샘의 헛수고를 풍성함으로 채워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예수님은 서먹한 베드로에게 다가오셔서 “조반을 먹으라”(Come dine)고 하신다. 요즘 애들 말로 대박이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그런데 밤샘한 춥고 배고픈 제자들의 아침 식사로는 충분하지 못했을까? 예수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신다. 이 부분을 어떤 주석가는 제자들이 무슨 고기를 잡았는지 좀 보여 달라는 요청이었다고 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의 ‘빈들의 잔치’처럼 얼마든지 넉넉한 이적으로 공급하실 수 있고, 제자들이 잡아온 고기를 먹었다는 기사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리스는 이 요구를 조반에 사용하기 위함으로 보는 것이 최선의 해석이라고 했다. 템플(Temple)도 “주님은 은혜를 베푸실 때 한 부분은 직접 당신의 것을, 다른 한 부분은 당신의 지도하에 맺어진 우리의 노력의 열매들을 쓰신다”며 “둘 다 주님의 은혜이지만 우리는 그 은혜를 주님의 은혜로 알고 받을 때에만 그것을 올바로, 또 충분히 누릴 수 있다”고 했다.

예수님의 말씀에 먼저 반응을 보인 제자는 언제나 베드로였다. 여기서도 마찬가지, 요한은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렸다(11절)고 했다. 그러나 6절에서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제자들이 힘을 모아도 배 안으로 그물을 끌어 들일 수 없었다고 했던 것으로 본다면 베드로가 앞장서고 제자들이 함께 한 일이었던 것 같다.

요한은 잡은 고기들이 큰 고기였으며 153마리였다고 했다. 숫자의 정확성을 좋아하는 기록자답다. 그런데 153이라는 숫자를 어떤 주석가는 고전세계에서 물고기의 종류가 153종이었다며 이 숫자의 의미는 복음이 범세계적인 효험을 지닌 것임을 상징한다고 추리했고,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은 100은 이방인을, 50은 유대인을, 그리고 3은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했다. 또 어거스틴(Augustine)은 “153은 1에서 17까지의 가산(加算)이며, 17에서 10은 율법의 수요 7은 은혜의 수, 따라서 이 수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이 이른다는 의미”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학자는 153개의 점을 정사각형으로 배열하면 17은 각 변에 나뉘어 배치가 된다며 흥미로운 기하학으로 해석을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R. H. 라이트풋(Lightfoot)은 “이런 설명들은 그물에 잡힌 물고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했다. 템플(Temple)도 “숨은 뜻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부당하며, 이 숫자는 잡은 물고기를 세어서 나온 숫자일 뿐”이라 했고, 모리스 역시 “어부들의 기록을 단순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한편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주석가 박윤선 박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속한 자들을 보호하심을 상징한다”고 했다. 우리의 관심은 숫자보다 오히려 12절의 기록대로 제자들이 경외심에 압도되어 입을 다문 채 조반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그 대상, 예수님께로 모아져야 한다. 요한은 감히 누구도 그 분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이 누구신지 안다면 물을 필요가 없는 질문이다. 그런데도 요한이 이렇게 기록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처음에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요한은 이 사건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셨을 때의 일이라고 했다(14절).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은 빼고, 부활하신 당일 도마가 없을 때와 1주일 후 도마가 있을 때에 이어서 세 번째라는 것이다. 요한이 이렇게 몇 번째라고까지 밝힌 것은 “누군가 흥분된 상태에서 만들어낸 허구가 아니었다.”는 W.바클레이(Barclay)의 주장대로 여러 차례 직접 나타나 보여주심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임이 입증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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