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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양용근 목사를 조명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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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향모 목사

 

양향모

광성교회 담임목사

개혁주의목회자훈련원 원장

양용근목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태어나고 살고 죽는 것이지만 특별히 순교자의 삶은 하나님께서 더 섬세하게 주관하신다. 순교는 개인이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특별히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양용근의 삶은 그가 순교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인도하셔서 특별한 삶을 살게 하셨다.

양용근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에 출생하여 일제가 망하기 두해 전인 1943년에 순교하였다. 이 시기는 크게 두 외국의 세력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점령하여 우리 민족을 말살시키고 일본화하려고 하였다. 그 정책 중 하나가 일본의 종교인 신도를 국교화해서 일왕을 현인신 즉 인간이자 신인 천황으로 추앙하게 하고 신사에 참배하게 함으로서 조선인을 일본화 하려고 하였다.

또 하나의 세력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은 복음을 들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기독교의 교회를 세웠다. 교회만 세운 것이 아니라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학교와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복지시설과 환자 치료를 위한 병원을 세워서 어려운 우리나라를 영육 간에 돕고자 하였다.

양용근은 이런 양대 세력이 활동하는 시기에 태어나서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신앙을 가지게 되고 부당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하여 순교를 하게 된다.

 

1. 양용근의 출생

양용근(梁龍根)은 1905년 10월 14일(호적 1905년 3월 14일) 전남 광양군 진월면 오사리 694번지에서 부친 양재훈(梁宰勛)과 모친 정정랑(鄭丁浪)의 5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호적에 기록된 본명은 양용환(梁用桓)이었으나 양용근(梁龍根, 일본대, 평양신학교 졸업장의 이름), 양복근(梁馥根), 양천정일(梁川正一, 광주지방법원 판결문 개재된 이름)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사용하였다. 현재도 호적명은 양용환으로 독립유공자(애국지사)에 등록되어 있으며 교계에서는 그의 신학교 졸업장의 이름과 목사 안수시의 이름을 따라 ‘양용근’으로 칭하고 있다.

 

2. 양용근의 신앙입문

양용근의 신앙입문은 그의 맏형인 양용이(梁用伊, 1895. 10. 23.~ 1942. 4. 26)의 전도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양용이는 동생 용근 보다 열 살 위였고, 씨족 부락을 이루고 있던 고향 전남 광양군 진월면 오사리 마을 전체를 관할하는 보수적인 가문의 전통에 투철한 집안이자 유복한 재산가였던 집안의 종손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조상제례문화를 따르는 유교적 전통을 가진 집안에 제사를 책임지는 종손이었다. 그러나 일찍 외지를 출입하면서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순천의 매산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학교에서 복음을 듣고 기독교 신자가 되어서 고향인 오사리의 본인소유 땅에 교회 건물 건축하고 교회와 함께 오사육영학당을 세워서 고향마을을 복음과 신교육을 알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한 인물이다. 가문과의 종교문제로 많은 고초가 있었지만 교회와 학교를 통한 신학문 전수가 가문을 살리고 마을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끝까지 굽히지 않고 일을 추진했다. 그가 1920년에 세운 오사교회는 “재건오사교회”로 지금까지 신앙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오사육영학당은 해방 후 “진월중앙초등학교”가 되었다(현재는 인구 감소로 폐교된 상태). 이런 맏형의 지도를 받아서 양용근 역시 복음을 받아들이고 형이 다닌 순천 매산학교에서 수학 하면서 더욱 신앙을 다져나갔다.

 

3. 양용근의 학업

양용근은 농촌 출신이었으나 유복한 가정으로 인해서 농사일은 배우지 않고 학문을 닦는 일에 매진해야 했다. 어린 시절에서는 집안 가문이 경영하는 한문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으며, 시국의 변화를 일찍 깨달은 부친과 큰형의 주선으로 1912년 8세의 나이로 이웃면인 진상면에 있는 진상보통학교에 입학을 하고 1920년에 광양서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에 순천 매산학교를 입학하였으나 매산학교 졸업장으로 일본 대학에 입학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1921년 당시 매산학교는 성경과목을 가르친다고 하여 폐교되었다가 다시 일제의 정책완화로 보통학교와 보통학교 고등과를 정식으로 허가를 받아서 개교 한 상태였다. 그러나 보통학교 고등과를 졸업한다고 해도 그 졸업장으로 일본의 대학에 입학 할 수 없었다. 당시 매산학교는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 6년 과정과 함께 보통학교 고등과 2년(지금의 중학교 과정 정도) 과정의 학교였다. 그러므로 고등과 2년을 졸업한다고 해도 5년제 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3년간 더 공부를 해야 했다.

이에 양용근은 일본의 검정고시 과정을 거치기로 하고 보통학교 고등과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일본에서 학원 수업 등의 독학으로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일본대 법대에 입학하고 졸업까지 하게 된다. 이후 귀국 후 평양신학교(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고 졸업을 하였다.

양향모(광성교회 담임목사, 개혁주의목회자훈련원 원장, 양용근목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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