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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는 복음의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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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향모 광성교회담임목사

교회의 역사는 교리의 역사이자 그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역사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를 떠나 비 진리와 타협할 때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이익을 포기하고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쳐 투쟁한 순교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

현대의 교회는 성경의 핵심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따르기 보다는 세상의 물질적인 축복이나 평안한 삶이나 바르고 보람된 삶을 추구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려는 노력이나 특별히 그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려는 순교의 신앙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교회가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와 대항할 때는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교회는 부흥하고 성도들의 신앙도 부흥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박해가 사라지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진리의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다른 복음, 변질된 복음을 따름으로 참된 교회는 점점 그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 교회의 핵심 진리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 핵심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순교의 신앙이 필요한 때이다.

 

1. 성경에서 말하는 순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거의 다 각기 순교로 생을 마감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특별한 지위와 그들이 특별히 받은 성령님의 충만하심과 은사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것들을 포기하고 다 순교의 길로 간 것은 그들이 알고 믿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 복음을 증언하고 전파하는 일이 영광스러운 사명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의 헬라어에서 순교라는 단어는 증인이라는 단어에서 왔다. 성경 안에서 ‘순교’와 관련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읽는 것은 ‘주의 증인 스데반’(Στεφάνου τοȗ μάρτυρός σου)이다(행 22:20). 성경 본문에서 ‘증인’으로 읽은 헬라어 ‘마르튀로스’(μάρτυρός)를 ‘순교자’(martyr, KJV, NIV) 혹은 ‘증인’(witness, ASV, RSV)으로 번역한다. 이 두 번역의 차이는 하나는 ‘마르튀스’를 일반적인 의미에서 접근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마르튀스’를 보다 전문적인 의미에서 번역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순교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서 삶을 살다가 목숨을 잃는 것이고 스데반처럼 성경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진리의 증인과 순교는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2. 교회사에서 말하는 순교

중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74)는 ‘마르튀리움’(martyrium) 곧 순교에 대해서 “순교자들은 ‘증인’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육체의 고통을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기까지 진리를 증언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첫째 ‘순교’ 곧 ‘마르튀리움’을 ‘증언’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중세 시기에는 ‘마르튀리움’은 ‘증언’의 의미보다는 ‘순교’의 의미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증언’의 의미를 다시 부각시켜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순교자는 증언자들이며 이들의 증언은 반드시 진리에 관한 증언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순교의 원인은 바로 이 신앙의 진리를 지키려는 실질적인 신자들의 행위를 말한다. 이것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개념으로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직접 경험하는 고통과 죽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에 이르는 모든 고통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며 그 원인은 반드시 참된 교리에 따른 신앙의 진리여야만 한다.

비록 오리겐(Origen, 185경~254경)이 박해에 의한 고문의 결과로 죽었다고 하나 그를 ‘순교자’라고 칭하지 않는 것은 죽음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교는 ‘죽기까지’ 진리와 신앙의 의무를 다하는 가운데 실제로 죽어야만 한다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이 순교를 넓은 의미에서 적용을 한다. 실제로 순교를 당하지 않았지만 복음적인 삶을 살기 위하여서 고난을 당한 사람들까지도 순교자로 간주하고 반대의 의미에서 피 흘림의 죽음을 당하였으나 복음 증거가 아닌 사회적 부조리나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투쟁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들도 넓은 의미에서 순교자라고 간주한다.

양용근 목사는 넓은 의미에서 순교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죽기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이며 말 한마디만 하면 죽음에서 고난의 삶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감옥에서 옥사한 진정한 순교자이다. 그는 증인이었고 순교자였다.

양향모(광성교회 담임목사, 개혁주의목회자훈련원 원장, 양용근목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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