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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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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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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전 교수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갑질유감

 

잊을 만하면 툭 불거져 온 나라를 힘들게 하는 단어 ‘갑질’이라는 신조어가 다시 국민들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대한항공 회항(땅콩)사건이 호되게 몰아쳤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이번에는 물컵사건으로 세간의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땅콩사건의 동생에 의해서 저질러진 판박이 사건으로 온 나라를 들끓게 하고 있다. 게다가 외국의 언론들이 이 사건을 기사화하면서 외국에서도 유명인사가 됐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갑질하는 나라로 인식되는 안타까운 현상도 나타나는 것 같다.

국민을 힘들게 하는 ‘갑질’에 대해서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지금까지 억눌러두었던 사건들이 폭로되기 시작하면 비판과 부정적인 의견들이 포털사이트마다 도배를 하고 있다. 대한항공의 사주의 삼남매만이 아니라 회장 부인과 회장의 갑질까지 봇물 터지듯 쏟아지면서 놀라게 하고 있다. 급기야는 대한항공의 운영권 문제가 들먹거려지고, 주가나 대외 신용도까지 곤두박질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이제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계열사와 지분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로 인식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사내에서도 그룹회장 일가의 갑질을 폭로하는 SNS방이 만들어져 운용되고 있다고 한다. 고구마 하나를 캐려고 들어 올린 고구마 줄기에 줄줄이 따라 나오는 고구마처럼 한 가지씩 알려질 때마다 시너지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다. 결국 회장이 나서서 여식들을 모두 현장에서 퇴진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하지만 민심은 더 끓어오르고 있다. 4년 전에도 그렇게 일선에서 퇴진 시켰던 딸을 슬그머니 다시 사장 자리에 앉힌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식이 전해질 때 마다 국민들은 힘들다. 당사자들도 힘들겠지만(?) 국민들은 더 힘들다. 도대체 갑과 을의 관계라는 것 이전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인데, 사람과 사람이 아닌 ‘그것’과의 관계인 현실은 무엇인가? 분명히 모든 관계는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 형성되는 것인데, 단지 ‘갑’이고 ‘을’이라는 위치 때문에 기분대로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닌 사람과 ‘그것’의 관계가 된다면 더 이상 사회를 형성하여 사는 것이 어렵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너’와 ‘나’라고 하는 인격적 주체들이 함께 하는 사회가 아닌 것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것을 스스로 부정하는 곳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과연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

‘갑질’은 아담 이후의 인간에게 주어진 타락한 속성의 현상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인간의 본능에 숨겨져 있는 탐심과 함께 자신보다 부족한 사람을 공격하고, 자기 마음대로 부리고, 단지 자신의 이익과 욕구를 충족시키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 그렇게 함으로 자기를 과시하고, 성취감을 누리려고 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자신의 지위나 소유에 따라서 드러내는 현상이 갑질인 것이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잠재해 있는 것이며, 그것은 자기 우월감이나 반대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자기 성취감이나 우월감을 느낄 수 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관계’에서 볼 때 자신이 고립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 부정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관계에서 출발한 것일진대 사는 것도 관계를 통해서 의미화가 된다. 그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관리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의미를 어떤 것이 되게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된다. 결국 관계의 선택은 자신의 일이다. 그 결과도 자신의 몫이다. 때로 필연적으로 주어진 관계도 있지만 적어도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형성하게 되는 모든 관계는 인격과 인격의 관계에서 만들어야 하고, 그 과정에는 철저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도리(책임)가 있다. 그것에 충실함으로 누릴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소유와 관계없이 그는 불행을 자초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관계를 통해서 산다. 그 관계는 선택일 수도 있지만 필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은 이미 관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사회학자들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즉 인간은 태어날 때 부자(父子)의 관계를 형성한다.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혹 예외가 있다고 할지라도 누군가에 의해서 양육을 받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으니, 이 역시 관계가 성립된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형태든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것은 ‘너와 나’라고 하는 필연적 관계를 존중해야 한다. 인간이 이 관계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나’로서 자신도 존중받을 수 없다는 것은 다시 필연이 된다.

인간이 관계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거기에는 분명 질서가 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처럼.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도 질서가 있다. 그 질서를 따라서 서로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관계이다. 단지 조건에 따른 ‘갑’과 ‘을’이 아니라 ‘나’와 ‘너’라고 하는 한 인격과 또 한 인격으로서의 관계이다. 거기에는 존중과 신뢰, 이해와 사랑이라고 하는 사이(間)를 연결하는 인간만의 매개가 있다. 그것을 부정하거나 배제한 채 관계를 말한다면 거기에는 ‘갑’과 ‘을’이라고 하는 필요와 조건에 따른 관계만 있을 뿐이다. 그러한 관계는 당장의 필요는 충족시켜줄 수 있지만 관계를 통해서 누릴 수 있는 인간만의 가치와 인간됨의 아름다움은 나눌 수 없다.

따라서 ‘나’와 ‘너’, ‘너’가 없을 때 ‘나’일 수 없다고 하는 ‘너’를 전제한 ‘나’를 생각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을 지으실 때 허락하신 질서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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