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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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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전 교수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부활유감

 

혹독한 겨울 동안 대지는 꽁꽁 얼었다.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았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맹추위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봄이 오는 날이면 가장 먼저 봄의 향기를 전하는 것은 겨우내 얼었던 대지다. 겨울동안 동토에는 죽음이 있었을 뿐 생명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가혹했다. 맨손으로는 접근할 수 없을 만큼 꽁꽁 언 대지는 어떤 생명도 허락하지 않았다. 지난 여름 무성하게 자랐던 생명들이 겨우 자신들의 실체가 있음을 죽음으로 알리고 있을 뿐. 나무들은 잎을 떨군 채 뼈다귀만 앙상하다. 풀들은 존재감을 드러내기에는 너무나 처참한 몰골로 흔적조차 확인하기 힘들다. 지구의 극지로 갈수록 겨울은 생명의 사지일 뿐 거기에는 어떤 생명을 확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지난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그리고 그 추위가 너무나 길었다. 겨울을 이겨내야 하는 생명들에게는 죽음을 경험하기에 충분했다고 할 만큼 많이 추웠다. 그래서인가 대지에서 생명을 느끼는 것은 더 힘들었던 것 같다. 가끔 생존을 위해 지나는 철새들이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보일 뿐, 죽은 듯 대지에서는 어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난 겨울은 얼마나 추웠는지 철새들도 더 남쪽으로 내려가 월동을 했기에 만나기 어려웠다.

동토는 사지가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그곳에 쓸쓸함, 외로움, 아픔과 슬픔만을 느끼게 했다. 겨우내 생명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은 없었다. 다만 봄을 알기에 그것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겨울을 이겨냈을 뿐이다. 하지만 봄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 봄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겨울은 지옥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 어떤 소망도 갖지 못한 채 죽음의 현실을 받아들여 절망과 죽음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고통 가운데 지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봄이 오던 날, 언제이었는지 모르게 이미 동토는 해토되었고, 거기에는 생명들이 자라고 있었다. 봄을 알리는 전령들은 아직 눈조차 녹지 않았음에도 꽃을 피운다. 아직 잎조차 내지 않았음에도 꽃부터 피운 것이다. 아마 둘 다를 내밀기에는 에너지가 부족했는지 모른다. 아니, 마음이 급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먼저 확인시키기 위해서 잎은 나중에 내고 먼저 꽃을 피웠는지 모른다. 어떻든 봄의 전령들은 공통적으로 잎은 내지 않고 꽃부터 피운다. 그래서인가, 봄은 화려하다. 그리고 죽었던 생명이 새롭게 살아나는 듯 애틋한 아름다움과 그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대지에 봄이 오던 날 생명체들이 앞을 다투며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또한 봄이 오는 날이면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전하고, 그 생명을 인간에게 보장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게 된다. 비록 절기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망각과 무뎌지는 심령을 갖고 있는 인간이기에 기억하고, 깨닫는 과정이 필요하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게 된다. 아담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죽음은 곧 심판의 결과다. 그 심판은 더 이상 인간에게는 어떤 소망도 없다는 의미다. 아니,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절망이다. 에덴에서 추방된 인간은 영원한 심판 가운데, 영원한 고통의 상태에서 영원히 머물 수밖에 없는 상태에 처해졌다.

예수님은 그러한 인간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인간을 위해서 죽음의 고통을 자처하셨다. 또한 그 사실을 알리셨다. 그러나 제자들조차 아무도 그 말씀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저 사는 날 동안 필요한 것을 함께했던 선생님이 먼저 별세하셨다는 정도의 생각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니, 정작 말씀하셨던 대로 부활하셔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누구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 제자들은 누구보다도 가깝게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지냈다. 때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에 직접 동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친히 말씀하신 다음에 그 길을 가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말씀하신 길을 가실 때 예수님이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가신다고 생각하지 않고, 실패한 선생님으로 여겼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지만 그들의 의식에는 그 말씀에 담긴 생명을 깨닫지 못한 채 실망과 좌절을 느끼면서 다시 소망이 없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3년이나 예수님을 따랐음에도 예수님이 죽음의 길을 가셨을 때, 그들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소망이 아니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 길을 갈 때 그들은 다른 사람처럼 소망이 없는 옛 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예수님은 그들이 따라야 할 소망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으리라. 이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을 잃어버릴 때 동반되는 현상이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길을 가신 예수님은 더 이상 주님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절망과 절대적 망각의 상태로 살고 있었을 뿐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말씀을 하신지 불과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제자들 가운데 누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왜일까?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하면 그 시간을 핑계로 망각의 은혜를 변명의 도구로 사용했을 텐데 불과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제자들은 간데없었다.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신앙은 어떤 것일지? 동토를 보면서 절망하는 것처럼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이미 생명이 없는 신앙을 하면서 잠시 위로를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생명이 없는 종교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산 소망이 되어주셨기에 감격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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