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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흔적(갈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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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흔적(갈6:11-18)

- 수많은 고난에 동참하였음과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를 따랐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 이것이 바울의 고백이자 그 몸에 지닌 그리스도의 흔적이었다.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점은 율법주의적 경향이다. 복음을 율법주의와 연결시키려는 유대주의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일종의 탈선이요, 거짓된 자유라고 보았다. 이들은 지지자를 얻기 위해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바로 이들을 상대해서 쓴 책이 갈라디아서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서두에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직은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았다”라고 말하고 있다(갈1:1). 물론 갈라디아서는 율법과 자유라는 중요한 주제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시도에 대한 답변으로 복음 안에서의 진정한 자유를 말하려는 의도가 있다. 바울은 이 편지를 다 쓰고 나서 결론으로 말하는 부분 중 그 마지막 한 말씀이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는 말씀이다.

여기서 말하는 흔적이란 ‘스티그마타’인데 신약성경에 이곳에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단어이다. 이는 소나 양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주를 나타내거나 종이 특정한 주인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국이나 소인을 찍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 때문에 당한 상처 혹은 자국이란 말로 보는 것이 관례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이렇게 고난당하며, 상처 입고 흔적을 남기며 살아 왔는데 왜 나의 사도직을 부인하느냐? 내 사도직을 부인하는 것은 내가 전한 복음도 부인하는 것이 아니냐? 라면서 자신의 사도직을 더 이상 부인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흔적이란 단어가 단수가 아니고 복수 ‘흔적들’ 로 되어 있다. 즉 내 몸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당한 육체의 흔적들을 지니고 있다는 말씀이다. 아마도 바울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 노예나 범죄자들의 신체에 낙인을 찍었던 그 흔적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갈6:14에서 말씀하는 바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하기까지 바울의 삶은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적인 것에 미련이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발견한 이후 세상과 자신의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다(빌3:5-9). 그는 새로 지음 받은 자였다. 그런 삶의 길을 갔던 그의 몸에는 그리스도를 인한 고난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 어떤 흔적보다 강한 그리스도의 사도 된 흔적이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자신의 사도직을 부인하려는 이들에 대한 실증적인 증거였다.

실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많은 고난을 당했다. 그 고난의 목록이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서 27절까지에 “…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의 몸에는 분명한 상처가 있었다. 빌립보에서 관원들의 매질로 손가락을 몹시 다친 일도 있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행14:19). 이 때 유대인들은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으로 끌어내 갔을 정도였다. 이 때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바울은 이 일을 잊지 못했다.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딤후3:11)고 했다. 그는 사경을 헤매는 심한 구타를 당한 것이다. 그에게는 깊은 상처가 있었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흔적이었다. 육체적인 흔적을 말할 뿐 아니라 그 흔적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의 실천적인 의미로 수많은 고난에 동참하였음과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를 따랐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흔적을 가졌다는 사실을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상처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섬김의 표였다.

오늘 우리는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어떤 흔적을 남겨야 할까?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다(갈6:14). 세상이 보기에는 십자가는 연약함과 불행의 상징이었지만 바울에게 있어서는 자랑이었다. 그의 생의 소원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였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고 했다(롬14:8) 박해를 피하기 위해 십자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할례를 자랑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삶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우리 생애 속에 어떤 흔적을 남기며 살아왔을까? 내가 살다간 그 자리에 어떤 흔적이 남을까? 허드슨 테일러는 죽을 때 자기의 무덤에 오직 세 단어를 적어 달라고 했다. 그것은 Man in Christ, 곧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는 말이다. 일생의 삶을 통해 그가 남긴 흔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던 삶의 여정이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우리 자녀들에게도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흔적으로 남겨주자. 디모데에게는 선대의 신앙의 유산이 남아 있었다. 디모데에게 있었던 거짓 없는 믿음은 그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왔고, 유니게의 믿음은 그의 모친 로이스에게서 온 유산이었다(딤후1:5). 말하자면 디모데에게는 그 어머니와 외조모의 신앙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우리 자녀들에게 믿음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

 

신재철(초원교회 담임목사, 부산외대 겸임교수, 한국교회 송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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