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목회

성경속세상 분류

무밥

작성자 정보

  • 연합기독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2018.2.6.>

무밥

 

매서운 삭풍이 대지를 지배하던 날, 생명 있는 것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하얀 밤을 새운 후 겨우 살아있음을 확인하면서 아침을 열었다. 자신의 입김으로 숨 쉬는 기쁨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새벽의 찬 공기는 폐부를 찔렀다. 한 TV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서 강원도 원주를 찾았다. 현장의 한 낮 기온이 영하 12도, 촬영을 위해 걸어서 이동하는 거리가 짧지만 매서운 삭풍은 온몸을 움츠리게 했다. 볼을 스치는 바람은 에는 듯한 통증을 느끼게 했다. 10시에 시작한 오전 촬영은 점심때를 지나 오후 늦게 마무리 됐다.

이미 시장기를 느끼는 시간은 지났다. 어쩌면 혹한의 날씨에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종일 부는 삭풍은 볼과 코끝을 알싸함을 지나 아프게 하는 바람이었다. 폐부 깊은 곳에 이른 공기는 가슴을 에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할 만큼 차가웠다. 촬영을 마치자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의 대외협력팀에서 늦었지만 점심을 접대하겠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지만 사양했으나 그 정도는 가능하다고 팀장이 극구 나섰다. 촬영팀과 함께 늦은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허름한 집으로 안내했다. 오래된 한옥의 내부를 털어내어 만든 식당이었다. 내부가 비좁다가 보니 처마를 잇대어 마당까지 간이 천막으로 확장한 것이 겨우 바람만 막아놓았다. 게다가 극한의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날이었으니 실내는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고, 겉옷조차 벗을 수 없었다. 손을 내놓고 있기가 부담스러울 만큼 썰렁했다. 하지만 벽에 걸린 그림들은 꽤나 수준이 있는 작품들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다시 일어나 벽에 걸려있는 그림과 글씨, 전각篆刻 작품들을 돌아보았다. 주인장이 평범한 사람은 아닌 듯한 인상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에 앉자 팀장이 주인장에 대한 소개를 했다. 원주의 정신적인 지주인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소박하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도 아름답게 보이는 주인장은 소탈한 웃음과 함께 우리를 맞아주었다.

팀장은 두 가지 메뉴인데 자기는 무밥을 추천한다고 했다. 귀가 번쩍했다. ‘무밥을 메뉴로 하는 식당이라고?’ 다시 물었다. ‘옛날에 시골에서 해먹던 무밥이 맞냐’고. 그렇다는 것이다. 팀장의 강력 추천으로 무밥을 기다렸다. 문제는 밥을 그때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다림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실내가 추운 상황에서 기다림의 시간은 더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심 무밥에 대한 기대가 평정심을 유지시켰다. 얼마 후 무밥이 나왔다. 간장 양념에 비벼서 한 술 떠 넣는 순간 입안에 감도는 맛은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입안 가득하게 느껴지는 무밥의 풍미는 한참이나 삼키기를 망설여야 했다. 겨울 무의 향기가 가득히 밴 흰쌀밥과 그 맛을 더하게 하는 간장양념은 신의 한수였다.

하지만 한편 걱정되는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동행한 PD였다. 유아입맛을 갖고 있는 PD를 슬쩍 훔쳐보면서 어깨를 툭 쳤다. ‘맛있지?’ 그는 헛웃음으로 대답했다. ‘이 밥이 맛있어야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한 마디 던졌다. 팀장과 나 외에는 무밥이 모두 처음이란다. 그럼에도 PD 외에 모두 이런 맛은 처음이지만 맛있다고 하면서 그릇을 비웠다. 무밥에 대한 이야기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가난했던 시대에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어머니들이 고안해낸 음식이 무밥이다. 쌀은 모자라고, 먹어야 할 식구는 많고, 한 술이라도 더 먹고 포만감을 줄 수 있는 식사를 만들기 위해서 채 썬 무를 넣어서 밥을 짓는 묘안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밥을 먹기 위해서 양념간장을 만들어서 맛을 더하게 했다. 무의 달착지근한 맛과 쌀의 단백질이 어울리게 간장 양념으로 맛을 더한 것은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다. 이제는 일반가정에 맛볼 수 없는 메뉴지만 무밥을 메뉴로 식당을 하겠다는 발상이 특이했다. 그리고 나름 쏠쏠한 재미도 있는 모양이다. 곁들여 내놓은 반찬과 먹을거리를 위한 생협운동을 하고 있는 주인장의 자부심까지 더한 무밥은 단지 한 끼의 식사를 넘어 기쁨과 감사한 마음을 더하게 했다.

잊었던 맛을 다시 찾은 느낌이랄까? 쉽게 접할 수 없는 맛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다시 경험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래도 식당이 운영되는 것은 많지는 않지만 찾는 이들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고, 어렸을 때의 맛을 기억하는 이들은 향수를 그리며 찾아드는 모양이다. 비록 가난한 시절의 맛이었지만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기에 맛을 따라 사람들이 찾는 것이 아닐까? 아주 저렴한 가격에 배도 부르고, 향수도 느끼고, 잊었던 맛까지 찾을 수 있었으니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박한 한 끼의 식사였다. 그럼에도 두고두고 기억날 수밖에 없는 식사를 하고 나서는 기분은 정말 좋았다. 비록 실내가 어둡고 추웠지만 그 맛은 아직도 잊을 수 없고, 어쩌면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내내 기억될 맛이 아닐지 모르겠다. 기름진 식사로 만족하고 이내 체지방 걱정을 해야 하는 현실에서 무밥은 여러 가지를 한 번에 해결해주는 멋진 식사이기에 충분했다. 여러 날이 지났지만 아직도 입에서 느껴지는 무밥, 진수성찬보다 먹는 기쁨을 더해주는 추억의 밥상이었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