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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한목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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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와 떠나는 성경여행 – 요한복음 36

 

나는 선한목자라

요10:11-21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 지라”(겔34:23). 이는 시78:70-72의 “그의 백성 야곱을 돌보고 인도하는 목자가 다윗”이라고 한 말씀과 시80:1의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표현한 말씀, 그리고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 하시리로다”라고 한 사40:11을 배경으로 한 말씀이다.

의롭지 못한 목자들이 도적질당하고 노략질당하는 양들을 방치하여 온 땅에 흩어지게 된 것을 개탄하며 자신이 목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시던 하나님께서 여기서는 선한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남왕국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에스겔의 예언이기에 이 예언 속의 다윗은 옛 통일왕국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이 아니라 다윗처럼 양들을 돌볼 분,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예수님을 가리킨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예수님만 회복하실 새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우신 유일한 목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친히 ‘양의 문’이라는 선언에 이어 자신을 두 차례나 ‘선한목자’(11, 14절, the good shepherd)라고 선언하셨다. 이는 디아스포라 세계에 흩어져 유리하는 양떼들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에스겔 34장의 그 선한목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선언이며 예수님의 네 번째 ‘I am’ 선언이다.

스스로 선한 목자임을 강조하신 이유는 우선 양들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겁 많고 의심 많은 동물, 토끼 한 마리에도 놀라 뛰되 한 마리가 뛰면 모두가 덩달아 뛰어 삽시간에 혼란에 빠지고 만다. 또 매우 신경질적인 짐승이라 하루살이 같은 것만 눈앞에 어른거려도 참지를 못한다. 뿐만 아니라 양이 순해서 평화의 상징처럼 보이나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서열싸움이 심해서 쉽게 눕지를 못한다. 게다가 눈도 나쁘고, 미련하고, 고집도 세다. 발을 잘못 디뎌 자빠지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나지도 못한다. 선한목자의 신실한 돌봄이 없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이유는 삯꾼들과 대조했기 때문이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고침을 받아도 그에 대한 사랑은커녕 오로지 자신의 신변보호와 안정된 생활추구에만 급급했던 삯꾼들과 대조적으로 출교당해 막막해진 그를 다시 찾아주시고 자신을 내어놓으셨기에 선한목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선한’(good)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뜻을 내포한다. 하나는 기술적인 면(functional)이고 다른 하나는 성품(character)이다. 역할을 잘하는 목자, 양을 사랑하는 목자이기에 선한목자(good shepherd)라는 말이다. 양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도 버리시는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조건 모두에 부합하는 바로 그 선한목자(the good shepherd)가 되기에 충분한 분이시다.

J.R.힐은 여기서 “예수께서 양들과의 관계를 말씀하고(14-16절),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씀하며(17-18절) 친히 보여주신 양들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과 양들을 하나로 모아야 할 사명,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은 십자가다. 만일 십자가가 없었다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약속의 목자, 그 선한목자에는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다. 결코 유다의 배반과 종교지도자들의 음모, 빌라도의 사형 선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신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순교자의 죽음이 아니라 대속의 죽음이었으며, 생명을 주기 위한 선한목자의 끝없는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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