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목회

목회영성이야기 분류

하나님의 아들

작성자 정보

  • 연합기독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이희우 목사와 떠나는 성경여행 – 요한복음 34

 

하나님의 아들

요9:35-4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시27:1-2) 시27편을 여기까지 읽으면 꼭 요한복음 9장의 맹인이었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눈을 뜬 사람의 고백처럼 들린다. 그의 처지와 너무 똑같다. 물음표와 동시에 느낌표로 시작된 이 시,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는 표현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라기보다 사실은 두렵다는 표현일 수 있다. “난 아무도 두렵지 않아” 큰소리치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더 두려워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또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만나 은혜로 눈을 뜬 후 바리새인들의 심문 중 ‘선지자’(17절),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33절)이라는 더 발전적인 신앙고백을 했다가 출교까지 당한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다시 찾아주신 예수님 앞에 일체의 주저함도 없는 신앙자세를 보였다. “네가 인자(人子)를 믿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즉각 “믿고자 하나이다”(I might believe on him), ‘오직 그리스도’라는 적극성을 보였다.

그 자세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37절), 드디어 자기를 계시하셨다. 당신 안에 있는 신성을 깨닫게 하는 그 엄청난 초청의 말씀에 그는 역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Lord, I believe). ‘인자, 곧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로 믿는다는 것이다. 이는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시27:3)라고 “I'm confident!”를 고백했던 다윗처럼 주님 앞에 명백하고 확실하게 서있겠다는 멋진 신앙고백을 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절하였다”고 했다. 메시야께 경배했던 것이다.

이 평안, 이 여유! 이는 다시 찾아주신 선한 목자로 인한 행복한 양의 특권일 것이다. 예수께서 마치 갈릴리 호수에서 풍랑 만난 제자들을 향해 물 위를 뚜벅뚜벅 걸어오셨던 것처럼 철저히 고립된 자신을 다시 찾아주신 그 사랑 때문에 이제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이기고 안정감을 누렸다는 것이다.

때로 신앙으로 살다보면 누구나 이 맹인이었던 사람처럼 따돌림 당하고, 손가락질 받고, 손해보고,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편한 길, 쉬운 길은 멸망의 길일 수 있다. 오히려 복음 때문에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다면 기꺼이 치르겠다는 자세여야 한다. 요한은 주님께 신앙고백하고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당장 핍박당하고 손해 보는 듯해도 결코 손해가 아님은 물론 오히려 보상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안식일을 범했다는 이유로 예수가 죄인임을 확인하고자 했던 바리새인들의 제3, 제4의 시도는 또다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아는 것이 전부인양 아예 알려는 마음을 닫은 자들, 보려는 눈을 스스로 감은 자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39절)고 하셨고, “그럼 우리도 맹인인가?”라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너희는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있느니라”(41절)고 그들이 스스로 맹인이 되었다고 하셨다. 그들은 작은 빛(율법)은 봤을지 몰라도 큰 빛(예수 그리스도)을 보지는 못한 셈이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