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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26 | 빌리 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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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광성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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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에슬리(빌리) 선데이(1862-1935)는 20세기 초 처음 30년 동안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고 가장 열매가 많았던 복음 전도자였다. 시민전쟁 때에 군인으로 참전했던 부친은 선데이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난, 고생, 그리고 고아원을 전전긍긍하면서 지내던 선데이는 14세 때 청소부로 일하면서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야구를 배우기 시작하여 결국 시카고 화이트 삭스에 입단될 정도로 야구 분야에서 명성을 남겼다.

1886~1887년 주일 오후 야구 시즌이었는데 선데이와 팀 선수들은 막간을 이용하여 거리로 나가 맥주를 마시고 시카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한 구석에서 그들은 멈추어 서서 ‘태평양 가든 선교회’에서 거리 전도를 하였다. 그들이 부르는 옛 복음성가에 감동을 받았다. 과거 모친이 불렀던 노래이기도 했다. 이후로부터 그는 선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물론 술 마시는 것을 그만 두었고 신실하게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896년 목회사역을 시작하여 1903년 시카고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외적으로 볼 때 세대주의자였던 선데이는 주일성수를 어기고 알코올 중독을 큰 죄로 보았다. 1910∼20년대 미국이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논쟁으로 전에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새로운 희망을 제시한 인물이 빌리 선데이였다. 그가 제시한 희망은 단순히 종교적 희망의 차원을 넘어 미국의 희망으로 자리 잡았고 미국인들은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했다. 이 기간에 공식적인 집회만 548회가 열렸고 87만75명이 회심했다.

빌리 선데이의 메시지는 미국의 희망과 너무나 잘 어우러졌다. 이민 증가, 도시 성장과 산업화로 인한 급속한 사회 변화와 세속화의 물결로 미국인들의 영적 가치가 흔들리고 있을 때 그는 보수적인 빅토리안 사회 가치로의 회귀를 촉구했다. 그 중에서도 술 문제는 빌리 선데이가 가장 강조한 부분이었다. 당시 술 문제만큼 시급한 문제는 없었다. 미전역에는 21만8000개의 술집이 있었다. 이는 150m마다 술집이 하나씩 있는 셈이었다. 이것을 거리로 환산하면 뉴욕에서 시카고까지의 거리였다. 매일 500만 명의 남자와 여자, 젊은이들이 술에 빠졌다.

정신장애아 75%가 술 중독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극빈자 80%, 범죄의 82%가 술에 취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졌으며 성인 범죄의 90%가 술에 의해 발생했다. 매년 5만3438건의 살인사건이 술집에서 발생했다. 1912년 미국 정부와 주정부의 주세 수입은 1억3400만 달러였지만 빈민·고아·범죄문제로 인해 정부가 지출한 돈은 6억 달러나 되었다. 주세 수입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술로 인한 사회 문제에 투입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희망을 꿈꾸던 미국인들에게 그의 메시지는 설득력이 있었다. 보스턴 시민들은 놀랍게 반응했고 실제로 사회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1919년 금주법이 미국에서 통과되었다. 빌리 선데이 부흥 집회를 달갑지 않게 여기던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 찰스 어드만 마저 “주님이 그를 사용하시고 계시다는 증거”가 분명하다며 빌리 선데이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공개적으로 표했을 정도였다. 한사람의 회심과 그의 복음사역이 한 국가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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