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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아모스 5: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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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아모스 5:21-24)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에 대한 책임이 있다

 

아모스는 경제적인 불의, 부정, 부자들의 탐욕이 심각하여 가난한 자들이 압제 당하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는 예루살렘 남쪽 드고아의 농부였다. 아모스는 ‘짐을 진 자’라는 뜻이다. 아모스는 평민 출신으로 가축을 기르고 뽕나무를 키우던 농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북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자로 부름 받고 불의한 역사의 한가운데 서서 하나님의 정의를 외쳤다. 아모스는 이스라엘과 유다 외에도 주변 여덟 나라에 대한 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선언한다(1, 2장). 이들의 죄는 전쟁에서 잔혹한 행동, 인신매매, 증오심 등이다. 그리고 현재의 이스라엘(3장)과 과거의 이스라엘(4장), 미래의 이스라엘(5, 6장)에 대해 설교하며 이스라엘의 행위가 심판받을 것을 강도한다. 특히 7장과 8장은 미래에 이스라엘에 내려질 심판에 대한 환상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죄 때문에 보응은 받지만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의해 다윗의 가계가 복원될 것을 말씀한다(9장). 그리고 땅이 새로워지고 포로들이 귀환할 것이라는 희망찬 선포로 끝을 맺고 있다.

아모스 선지자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위해 활동했다. 아모스가 활동했던 시기에는 남유다에는 웃시야가, 북이스라엘에는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때였다. 이때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버금가는 평화와 번영의 시기였다. 아람왕 벤하닷 3세가 앗수르에 패망하여 북이스라엘에 전쟁의 위험이 사라지자 경제적으로도 번영하여 건국 이래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경제적 번영은 빈부의 격차를 가져왔고, 계층과 사회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사회 정의가 무너지고 사회악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돈이라면 의인도 팔아먹었다(암2:6). 즉 뇌물을 받고 불의한 재판을 진행하거나, 죄 없는 자를 노예로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신 한 켤레에 가난한 자의 인권을 유린하며,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난한 자를 착취하여 심지어는 머리에 있는 티끌까지도 탐을 내었다(암2:7). 겸손한 자를 학대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인과 관계하여(암2:7) 도덕과 윤리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책망이다. 모세율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되는 죄이다(레18:6-18, 20:17-21). 아모스가 선지자로 부름 받았을 당시는 경제정의가 무너져 빈부의 격차가 컸고, 사법정의가 무너지고 도덕과 윤리가 사라져 사람들의 행위는 고삐 없는 말처럼 원리나 규범이 없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시대의 우상숭배였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형식화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종교가 사회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종교의식은 남아 있었으나 그것은 형식화된 의식에 지나지 않았고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했다. 종교는 그 사회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아모스가 선지자로 부름 받았을 당시 종교는 부패했고, 성전예배는 형식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말씀이 암5:21 이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이 있다. 암5:21에서 말하는‘절기’란 3대 절기, 곧 유월절(무교절), 맥추절(칠칠절), 수장절(초막절)을 의미한다(출23:14,17, 34:23, 신16:16,17). 하나님께서 이 절기를 미워하신다고 했다(암5:2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선을 추구하며 정의를 세우는 일이지(암5:14,15) 그럴듯한 종교행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율법에 기록된 의식들을 아무리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준수했다 하더라도 그런 노력은 헛수고였다. 그들의 종교행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참 신앙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내용 없는 형식이나 정신없는 의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사랑이 없는 절기는 무의미하다.

암5:22의 ‘번제’는 동물을 완전히 태워서 그 향기로 드리는 제사이다. 소제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선물로 바치는 제물을 가리킨다(창4:3-5, 민16:15, 삼상26:19). 특히 여기에서는 번제물에 병행해서 드리는 곡식제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번제나 소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총체적인 제물을 대표하는 말이다. 암5:23의 화목제는 여호와께 드린 후 제물의 일부를 바친 자가 가족, 친구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만큼 풍성한 음식으로 화목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들을 받지도 돌아보지도 않겠다고 하셨다. 이들의 제사는 형식은 완벽하게 갖추었을지 모르나 제사의 참된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 곧 내적이고 본질적인 것이지 외형적이고 가식적인 것이 아니다(시51:16,17).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이런 것들은 쓸데없는 것이다.

암5:23에서는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솔로몬의 성전건축 이후 희생제물과 더불어 찬양대의 찬양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일부가 되었다(대상16:41,42, 23:5, 25:1). 여러 악기들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찬양도 받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다. 겉으로는 모든 악기가 동원된 화려한 예배였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실속 없고 가치 없는 것들이었다. 정의를 행하지 않는 외형적인 찬양과 형식적인 예배를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이다(암5:24). 백성들의 잘못된 예배는 정의와 공의의 결여라고 볼 수 있다.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기도 하지만(사10:22), 아모스는 인간사회에 구현되어야 할 원리로 보았다. 즉 율법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 사회구조 속에서 구현되고 정직하게 이웃을 대할 때에야 비로소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이란 신자의 정체성을 드러냄으로서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정의가 이루어지고, 우리 신자들이 정의를 실천하고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선한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이다.

 

신재철(초원교회 담임목사, 부산외대 겸임교수, 한국교회 송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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