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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 | 대화와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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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건영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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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은 부자가 어머니의 생신을 맞이하여 고민이 생겼다. 웬만한 것은 이미 다 선물하였던 까닭에 무엇으로 준비하여 감동을 드릴까 생각하던 중 특별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수입된 새 이야기였다. 그 새는 훈련이 잘 되었고 참으로 영리하여 무려 150마디의 말을 할 수 있으며, 3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새라는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한국 가곡을 5곡이나 부를 줄 안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가격은 엄청나 약 삼천만원을 호가하였으나 효심 가득한 이 아들은 기꺼이 그 새를 구입하여 퀵서비스로 보내 드렸다. 그 다음 날 배달이 잘 되었을까 궁금하였다. 어머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 어제 배달된 그 새 어때요?” 그러자 어머니는 너무나 만족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그래, 고마웠다. 그런데 그 새 고기 참 맛있더라! 한 마리 더 부탁할 수 있냐?”

우리는 살아가면서 평범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평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평범이 비범을 낳는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대화와 소통은 평범하며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삼천만원짜리 새를 잡아 먹는 것과 같은 우매함을 보이며 피차 충격과 아픔을 받게 될 것이다. 대화는 이해를 잉태하고 소통은 화합과 일치를 낳는다. 그러나 상대방을 향해 빈정대거나 무시하는 대화는 대화가 아니다. 언어폭력이다.

어느 판사가 한 피고인을 일곱 번씩이나 재판하게 되었다. “아니, 이 친구 또 만났네. 피고는 나를 이렇게 많이 보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나? 그 긴 세월 동안 수많은 회복의 기회가 있었을 것인데 왜 거절하고 나를 일곱 번이나 만나는가?” 그 말을 듣고 있는 그 피고가 판사를 향해 이렇게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판사님도 참 답답한 분이시네요. 지난 긴 세월 동안에도 승진 못하시고 저를 계속 만나는 것이 왜 제 탓입니까? 판사님 탓이지요.” 소통이 아니라 불통이다.

소통이 가능한 대화에는 기본적인 규칙이 있다. 그것은 ‘1.2.3 법칙’이다. 내가 1분을 말했다면 2분 동안 상대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되 그 때 3번 정도 긍정하는 표현을 하라는 것이다. 이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까닭은 우리는 민주화의 기쁨도 누렸으나 동시에 정치와 노사관계를 통하여 절대로 양보하지 않고 오직 자기주장만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흐름에 이미 동화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각 당 대변인의 발표와 노사의 성명서는 항상 틀에 박혀 있다. 배려와 타협이 전혀 없는 짜증 그 자체이다.

이제 이런 흐름의 마지막 희망은 교회요 교인이다. 우리들이라도 자신의 의견과 주장만큼 상대방의 언행을 존중히 여기며 대화해야 한다. 이해와 일치와 감동은 배려에서 오는 것이지 결코 자기주장 관철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은 그 누가 자신에게 행한 말과 일(to do)을 중심으로 그를 평가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그 사람의 존재 자체(to be)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도저히 대화와 소통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라도 그 분 역시 성도님처럼 분명 또 하나의 하나님 작품인 것이다.

즉 내 자신에게 좋은 언행을 보였기에 귀한 존재가 아니다. 그도 하나님 존전에서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잘 섬길 때 교회가 변하고 세상이 변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할 이유를 비기독교인들이 알게 될 것이다. 사람에 대한 배려가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열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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