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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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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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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

 

오랜만에 고속열차에 몸을 실었다. 먼 길을 떠날 때 마다 스스로에게는 숙제가 주어진다. 승차시간과 비례해서 읽을 책을 결정하는 것과 그것을 가고 오는 시간에 읽어야 하는 숙제다. 그 숙제를 잘 감당하는 여정이 되면 돌아오는 길에 기분이 좋다. 성취감과 책을 통해서 얻은 것에 대한 기쁨 때문이다. 하여, 언제나 먼 길을 나설 때면 어디를 가든지 먼저 어떤 책을 읽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물론 여정의 성격이나 동행인 여부 등이 책의 내용을 결정한다.

이번 여정도 한국에서는 꽤 긴 편에 속했다. 광명역에서 목적지인 창원중앙역까지는 꼭 두 시간 반이 걸린다. 그러면 왕복 5시간이다. 그리고 오후 1시부터 시작하는 강의는 저녁식사 전까지 예정이니, 강의가 끝나면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아침까지 여유가 있을 것 같아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세 권을 챙겼다.

하지만 탐승해서 자리를 잡고 준비한 책을 펼쳐서 불과 몇 페이지나 읽었을까. 온 몸이 땅으로 꺼지는 것과 같은 피로감이 눈꺼풀을 짓눌렀다. 아무리 들어 올리려고 해도 불가능했다. 결국 책을 덮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 10여 분쯤 지나서 눈을 뜨니 몸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정신은 좀 맑아졌다. 눈을 붙이기 전에 접어놓았던 곳을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엔 졸음이 문제가 아니라 창밖에 스치는 정경이 더 이상 나로 하여금 책에 집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직 계절이 이르다고 생각했는데 봄은 이미 깊어 있었다. 창밖의 정경은 신록의 싱그러움과 생명력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풋풋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잎사귀들이 살랑 부는 봄바람에 고개를 흔들고 있다. 국토를 종단하여 내려가는 길을 내어준 채 높이 솟아있는 산과 간간이 펼쳐진 들녘이 온통 푸른빛이다. 신록이 아름다운 것은 깊어진 봄날에만 맛볼 수 있는 것이기에 온몸에 전율이 느껴질 만큼 멋진 풍경이 나의 시선을 완전히 빼앗았다.

겨우내 말랐던 나뭇가지에 움이 돋고, 연초록의 싹이 돋아나는가 했는데 벌써 가지마다 잎사귀를 달았다. 비록 작고 앙증맞게 풋풋함으로 채워진 나뭇잎들이 고개를 숙인 채 바람에 살랑일 만큼 자랐다. 멀리 뵈는 산야는 벌써 신록의 물감으로 채색을 끝냈다. 바람이라도 조금 불면 건너편 산기슭이 일렁이는 연초록의 물결이 살아있는 그림이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열차에 몸을 실은 채 비록 스치는 바람은 느끼지 못하지만 생명의 아름다움을 파스텔 톤의 물감으로 그려놓은 거대한 작품을 만끽할 수 있었다.

책은 펼쳐서 든 채로 눈은 창밖에 스쳐지나가는 봄날의 신록에 취했다. 책으로의 여행이 아니라 봄날의 신록에 취하여 오랜만에 봄날을 담은 수채화를 감상하는 여행이 되었다. 깊은 봄날에만 느낄 수 있는 정경이기에 특별한 생각이 필요하지 않다. 비록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느 봄날의 알프스 언덕이 아니더라도 지금 눈앞에 펼쳐진 봄날이 더 아름답기에 내 눈은 창밖에서 돌이킬 수 없었다. 아직 모를 낸 무논은 없지만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논에도 푸른빛이 자아낸 봄날의 정취가 조화롭다.

창원행 고속열차를 타지 않았다면 봄날에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정경을 놓칠 뻔했다. 무심히 지나쳤더라면 금년 봄이 만들어준 신록의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할 뻔했다. 나를 실은 고속열차는 무심하게 달리지만 순간순간 바뀌는 봄날의 정경은 숨을 막히게 했다. 숨을 몇 번이나 크게 쉬면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장면들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스토리도 없고, 기획자도 없으며 연출자는 더더욱 없다. 그럼에도 펼쳐지는 새로운 장면들은 최고의 그림들이다. 그냥 눈을 한 번 들어 봄날이 만들어놓은 정경을 바라볼 수만 있어도 되는 것인데, 무엇에 쫓기는지 창조주의 작품을 감상하지 못하고 깊은 한숨만 쉬면서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신록에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읽어야 할 책은 절반밖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과 마음이 호사할 수 있었으니 책에서 누릴 수 없는 봄날의 선물을 받은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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