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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계의 일치는 요원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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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계의 일치는 요원한 것인가…

 

1945년 8월 15일, 갑자기 찾아온 해방은 재생과 희망의 새 역사를 약속하는 듯 했다. 기쁨을 억누르지 못했고 민족적 활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그동안의 핍절과 일제의 혹독한 통치, 박해, 우리 민족을 짓밟았던 불의한 것들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한꺼번에 왔다. 모두가 새로운 희망의 역사를 기대했고 자유와 민주의 건설을 추진할 수 있다는 확신이 가득했다. 모든 자유가 보장되고 하늘로 그 날개를 마음껏 펼칠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이라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일본이 물러간 상황에서 민족의 새로운 명제는 완전한 근대 자주독립국가의 실현, 곧 '새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이었다. 이를 위해 몇 가지 난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하나는 일본이 빠져나간 상황에서 어떠한 지도력, 곧 독립국가로서의 위상 확립과 그 운영을 할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였다. 상해 임시정부나 중경정부를 거쳤다고는 하나 우리에게는 국가 운영의 능력이나 경험이 전혀 없었다. 또 다른 하나는 일본도 경험하지 못했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어떻게 실현하고 완성해 나가냐 하는 문제였다. 북한을 점령하였던 소련이 공산정권을 세워나가고 있던 상황에서 그 긴장감은 적지 않았다.

이러한 민족적 과제의 해결은 기독교계로 귀착 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계가 근대 교육을 선점하고 있었고, 교회 내부에 민주주의를 체득한 민족 지도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자(留學者)들도 적지 않아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월한 입장에 있었다.

1945년 11월, ‘조선기독교남부대회’가 열렸다. 이승만은 ‘기독교 건국’을 강하게 외쳤다. 김구도 ‘건국(建國)과 건교(建敎)의 일치’를 강조했고, 김규식은 “예수교가 정치화해서 정치적으로도 3천만을 이끌어 나갈 것”을 피력했다. 특별히 김구는 “10개의 경찰서를 짓는 일보다 교회 1개를 짓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도 했다. 대부분의 교회지도자들도 기독교가 나라의 기초가 될 수 있다 믿었고, 복음을 통하면 반드시 민주주의 국가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한국교회가 민족을 위해 가장 필요한 사람을 육성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주장이 난무했다. 생각지 않았던 문제들도 속속 드러났다. 협력이나 양보는 없었고 각 정파의 목소리는 커질 수 있을 만큼 컸다. 해방 정국의 주도자들을 따르는 사람들, 곧 이승만계, 안창호계, 김구계, 김규식계가 싸웠다. 기호계 기독교 민족주의자들과 서북계 기독교민족주의자들도 서로 갈등했다. 특별히 과거를 둘러싼 논쟁들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상대의 공헌과 공적은 인정하려 하지 않고 과오는 날카롭게 드러내려했다. 깨끗한 제거와 엄격한 단절로만 역사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고 일순간에 모든 것이 재건될 수도 없었음에도, 또한 시간이 많지 않았음에도, 서로에 대한 비난의 소리를 높였다. 협상은 없었고 문제제기만 있었다.

결국, 실질적 의미의 근대 자주독립국가와 자유민주주의라는 민족적 과제는 민족적 아픔과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기독교계가 그토록 꿈꾸었던 기독교적 건국은 물거품이 되었고, “기독교야 말로 서양문명의 토대이며, 가장 훌륭한 정부나 민주주의에 기초가 된다"는, 설립 초기부터 주장해 왔던 한국교회의 자신감은 힘을 잃었다.

해방의 정국과 지금의 시대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시대와 민족을 이끌 수 있는, 일치에서 생성되는, 기독교계의 에너지는 생겨나기 어려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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