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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명을 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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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선정 기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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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 신기중앙교회

이희우 목사와 떠나는 성경여행 – 요한복음 49

 

새 계명을 주리니

요13:31-38

 

유다가 기회를 박차고 대제사장에게 가면서 이제는 십자가가 현실이 됐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인자(人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31절)라며 당신을 팔려는 계획이 실행 단계에 접어든 상황을 ‘비극이 시작된 지금’이라고 하지 않고 ‘당신이 영광을 받을 때가 시작된 지금’이라고 하셨다. 갈보리 언덕 위에서 완성될 온전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영광을 받았고’라며 마치 이미 끝난 것처럼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광이 아니다. 말씀은 영광을 받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십자가의 길을 걷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면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 관계성에 근거한 강한 확신이 없었다면 결코 걷기 힘든 길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남게 될 제자들을 ‘작은 자들아’라는 사랑의 애칭(愛稱)으로 부르며 각별한 사랑을 보이신다(33절). 그리고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자신의 가르침은 어렵더라도 그들을 향한 따뜻한 애정을 알아주길 바라신 예수님은 7:33과 8:21에서 유대인들에게 이미 말한 것처럼 당신이 가는 곳에 제자들이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에서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면 그 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당시 제자들의 수준이 십자가라는 죽음의 길과 영광의 길에 동행할 정도는 아님을 아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곧 가신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제자들이 꼭 품고 발휘해야 할 본질적인 것을 말씀하셨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 것이다.”(34-35절, 새번역). 헬라어의 강조 용법으로 ‘새 계명’(New Command)이라 하셨지만 사실 사랑이 새 계명은 아니지 않나. 모세의 율법인 레19:18에서 주셨던 계명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J.R.힐은 예수님의 새 계명은 친구를 자신보다 더 사랑하라는 것, 친구를 위하여 기꺼이 죽는 수준(15:12-13)이라며 모세의 율법에서 드러난 구약의 계명보다 더 높은 수준의 사랑이라 했고, 플루머(Plummer)는 그 동기가 새롭다고 했다. 예수님이 먼저 사랑해주셨기 때문에 그 놀라운 사랑에 감격한 이웃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 수준의 사랑을 그들의 배지로 삼아 당신의 제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기를 원하셨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사랑이 없는 한 이방인들을 실족시킬 수밖에 없는데 그들은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인색해서 함께 어울릴 수 없었다.”며 당시 기독교인들이 너무 사랑이 적었다고 했다. 지금은 어떤가? 아마 당시만도 못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큰 것 같다. 그래서 서로 사랑할 때만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요한일서에서의 후속 메시지(요일 3:23; 4:7, 11, 19-21)는 지금 이 시대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어디든 따라가되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베드로의 호언장담(豪言壯談)에 예수님은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게 될 것”이라며 배반을 예언하셨다.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의 관심은 부질없는 호승지심(好勝之心)의 결단이 아니라 ‘변함없는 사랑과 서로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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