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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와 떠나는 성경여행 – 요한복음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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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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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우 목사

 

절묘한 타협안(요18:38-39)마저 거부당한 우유부단한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의 뜻에 굴복하여 죄가 없음을 알고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준다. 채찍질과 주먹질, 가시면류관으로 인해 피로 얼룩진 비참한 예수님을 보여주는 연출이 나름대로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는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당신들이 잘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자하는 무언의 반박과 조소였을 수는 있다. 그러나 결국은 물러서지 않는 대제사장들에게 굴복한 꼴이다.

1차적인 판결은 “너희가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6절하)였다. 여기서 ‘너희가’라는 표현은 “나는 상관하지 않을 테니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뜻, “정말 원한다면 십자가에 달아라. 그러나 그 책임은 너희에게 있다”는 말이다. 빗발치는 요구에 굴복하기는 했어도 유대인들의 사형 집행은 돌로 치는 것이므로 “너희가 나를 무시하고 십자가형을 감행할 수는 있냐?”라는 의미였을 수도 있다.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도 법이 있다”, ‘신성모독 법’(레24:16)을 들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죽여야 한다며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관점에서 다시 보라고 압박했다. 요한은 빌라도가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다(8절). 피지배국의 고유 종교와 그 관행을 존중하라는 통치지침이 있기는 해도 아내가 귀띔해준 꿈 이야기(마27:19)로 인해 흔들렸을까? 아니면 심문 중 감명 받거나 초자연적인 존재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매료되었을까? 다소 미신적이었던 빌라도는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말에 전전긍긍하며 함부로 처결할 수 없었다.

다시 관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너는 어디로부터냐?”(Where did you come from?)라며 심문을 재개했다. 하지만 No answer, 예수님은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이는 이미 충분히 대답하셨기 때문이거나 대답한들 알까 하는 생각이었을 수 있고, 빌라도가 심판자로서의 자기 역할을 기피하고 있음을 간파하셨거나 유죄인지 무죄인지만 밝히면 될 사람이 이 상황에서 자신의 기원을 묻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거스틴(Augustine)과 크리소스톰 (John Chrysostom)은 이 침묵을 이사야53장 7절 예언의 성취로 봤다.

이 자존심 상하는 심히 민망한 상황에서 막강 권력자 빌라도는 총독으로서 자기에게 살려줄 권세도 십자가에 죽일 권세도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당신을 심판할 권세는 ‘위에서 주어’ 위임받아야 한다고 반박하며 ‘자신을 넘겨준 자의 죄가 더 크다’고 하셨다. 모리스는 “그는 가야바를 가리키며 ‘더 크다’는 표현은 총독의 죄가 그 다음에 해당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빌라도가 자기 판단과 계산에 따라 무죄를 알고도 내릴 사형선고도 사실은 인류 구원을 위한 감추어진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임을 드러내셨다.

요한은 비록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도 빌라도가 예수님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해지면서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힘썼다(12절)고 했지만 빌라도는 로마 황제(皇帝)를 하나님의 아들(divi filius)이라 칭하는 게 관례였던 시절에 자신들의 소원대로 예수의 십자가형을 언도하지 않으면 ‘가이사의 충신’(Caesar’s friend)이 아님을 고지(告知)하겠다는 대제사장들의 협박카드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는 비겁한 최종판결(16절)을 하고 말았다. 이는 그의 일생에 최대의 결정적인 오점(汚點)이 된다.

판결 후유증은 엄청났다. 성도들이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할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며 그를 예수께 고난을 가한 악인의 대명사로 거명하는 치욕적인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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