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복지

미래의 교회교육 분류

선택훈련, 만남의 훈련

작성자 정보

  • 연합기독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한 학생이 학교 채플을 거부함으로 사회문제화 되었다. 그 학생의 아버지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고집은 꺾지 못하고 강제 예배 출석은 없어질 모양이다. 나의 눈에는 종교적인 문제로 보이기보다 교육방식의 문제로 보여졌다. 기성세대가 경험했던 신앙과 교육의 결과에 대해 기존의 학생들은 거부하며 자신의 정체감을 찾으려 하고 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결과를 강요하지 말라는 아우성이고 이러한 움직임은 날로 커져 나갈 것이다.
학생들은 뒤에서 기성세대들을 “뻑하면 가르치려는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에서도 점점 편만해 질 것이다. 기존의 교육 속에 숨겨져 있는 일방성에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을 학생들은 다양하게 표출하고 있다.
예전에는 기도하면 좋은 배필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교육하였지만, 그러한 논리는 점점 사라질 것이다. 요즘은 함부로 중매를 설 수 없는 시대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부모도 모르는 판국에 교역자의 식견이 정확할리 없다. 그렇다면 무슨 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할 것인가?

선택훈련을 시켜야 한다. 다양성 속에서 내가 선택한 것이 신앙적으로 내 진실 속에서 내가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다는 결단 속에서 분별하며 선택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이것을 해라’는 식의 지도는 교육자의 의도가 100%이기 때문에 피교육자의 만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방식보다는 피교육자가 선택할 기회를 주는 가운데 교육적 의도를 충족시켜야 한다. 즉‘이것을 할래? 저것을 할래?’라는 방식은 피교육자의 의도가 들어갈 여지가 있기 때문에 만족도가 증가한다. 물론 ‘네 맘대로 해라’가 피교육자의 입장에서는 제일 좋겠지만 피교육자의 자발성이 준비가 되지 않을 경우에는 혼란을 야기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자는 완전 자율 이전에 중간단계를 가져야 한다. 선택의 권한이 그것이다.
예배를 강요한다고 느끼는 이 시대에 그들이 예배를 대용할 만한 중간단계의 신앙 프로그램을 미리 상정하고 학생의 자발성을 유도해야한다. 그리고 선택권을 학생에게 이양하는 것이다. 선택의 폭이 넓을수록 반발심과 거부감은 사라진다. 이게 인간 심리의 작동이고 인간의 마음이다.

만남도 사랑도 결혼도 선택이다. 그 선택을 위한 훈련을 시켜야 하는 것이지 무조건 믿음으로 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점점 사라진다. 과학에 종교(초월성)가 필요하듯이 종교에도 과학(합리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사귐을 시작하는 남여가 결혼으로 갈려고 한다면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까? 결혼예비학교가 전부일까? 서로 끌리는 것의 숨겨진 의도를 보게 해야 한다. 상대를 선택하게 된 무의식적 동기를 깨닫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러는 가운데 그 결함과 부족함을 알고도 선택을 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책임을 지게 된다. 예전처럼 권위를 가지고 결혼을 강요하다가는 어려움이 닥칠 때 쉽게 그 권위에 대한 원망을 갖게 될 것이다.
지도자는 교육적 목적을 상정하였다면 그 과정에 많은 징검다리를 둬야 한다.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식의 리더십은 멸망하기 좋은 시대이다. 그렇게 무조건 믿고 따를 사람도 점점 업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 징검다리 속에는 분노도 있고 기쁨도 있고 만남도 있게 하라는 것이다. 집단 다이내믹과 집단 선택이론과 같은 훈련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결론(고기)을 주지 말고 과정(고기 잡는 법)을 주어라 우리 교육현실에서 한번 되새겨야 한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