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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패러다임의 전환 ①놀이의 교육, 치유의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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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준교수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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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가장 두드러진 교육 현상의 하나는 ‘놀이’다. 진지함과 엄숙함의 교육에서 ‘놀이의 교육’ 또는 ‘치유의 놀이’의 개념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기독교에서도 놀이를 허용한 시점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오히려 놀이란 우리의 경건생활을 방해하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여겼던 역사가 있었다. 독일의 한 학교 규칙은 이렇게 규정되어 있었다. “어린아이들을 종교적인 것으로 가르쳐 노는 것(play)의 어리석음과 쓸데없음을 알게 해야 할 것이다.” 19세기까지 미국교회도 똑같은 발언을 했다. “우리는 놀이를 가장 엄격하게 제한한다. 학생들은 놀이 자체를 하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 그 기원에는 교부신학자인 크리소스톰의 유명한 발언 “하나님이 우리에게 노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악마가 주는 것이다.”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에서는 놀이와 춤 그리고 연극을 이교도, 욕망, 그리고 마귀와 동일시하였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문화 인류학자인 호이징가(J. Huijinga)나 심리치료가인 코헛(Hinz Cohut)이 놀이의 신학자로 불리듯이 놀이에 대한 중요성은 다양한 분야에서 확인되고 연구되어지고 있다.

아동 심리학자 위니컷(Winnicot)은 더 나아가 어른이야말로 놀이를 하는 주요 대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화 경험이란 창조적으로 사는 것이고, 창조적으로 사는 것은 놀이를 통해 나타난다.” 라고 주장했다. “놀이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살아가는데 기본이 된다”고 했고 “놀이는 치유의 다른 형태이고 바꾸어 얘기하자면 치유과정은 놀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에서 심리치료에 이르기까지 아동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놀이는 이제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교육현장에서도 전달의 수단으로서 혹은 놀이자체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놀이는 사회문화적 희생만을 강요당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순간이며 자신과 타자, 인식의 범주를 확대 시키는 순간이다. 그래서 심리치료의 장에서는 놀이의 치료가 아이에서 어른까지 중요한 부분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교육에서의 놀이는 무엇인가? 레크리에이션과 찬양율동이 오늘날까지 주류를 이루고 있는 듯 보인다. 혹은 오늘날 우리 교회문화를 자리 잡고 있는 경배와 찬양문화도 놀이의 한 축으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설교를 하기 위해서 혹은 교육을 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서의 놀이를 이용하고 있지만 학자들은 그 모든 것 자체가 놀이화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런 경향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배가 축제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논리다. 그러나 구호만 그럴듯하지 방법론에서는 인도자 중심의 예배와 교육이 틀에 짜여진 흥겨움을 강요하고 있다.
현대 놀이학자들은 놀이란 자기 자신을 어느 것에도 구애 받지 않고 드러내는 순간이 진정한 놀이라도 말한다. 그 순간에 인간은 참 자유를 느끼고 존재가치를 느낀다고 말한다. 심리치료의 장에서는 마음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놀이부터 시작한다. 그것이 음탕한 것이든 이상한 것이든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모든 내적치유현장에서도 이러한 과정은 필수이다.

하지만 그러한 드러냄의 문화가 되기에는 많은 규범과 틀이 너무도 많이 교육공동체 내에 있다. 그래서 피교육자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으며 그 가운데 자발성은 떨어지고 창조성도 위축된다. 교회에서 교인들의 은밀한 문제는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의 은밀한 이야기를 상담할 경우 결국은 교회를 떠나게 된다는 논리다. 모든 사람들은 다 안다. 교회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처럼 미련한 짓이 없다는 것을, 상처받지 않으려면 꼭꼭 숨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 교회 내에서도 도움 받지 못하고 밖에서도 해결하지 못하게 막는 상황에서 고통당하는 개인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 진짜 핵심문제는 그러한 은밀한 비밀 속에 있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말하라고 강요한다. 그렇게 하나님에게만 부르짖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물에는 우리 교육의 병폐가 숨어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드러냄을 다루는 문제는 전문가적 훈련이 필요하다. 왜 드러냄을 놀이와 함께 수반되어져야 하는지 생각해 보라 진지하게 엄숙하게 드러냄과 놀이로서 가볍게 드러냄의 차이, 인간의 상처의 치유 시스템, 인간의 역할 확장 등의 치유의 놀이에는 숨어 있다. 이러한 교육이 신학교에서부터 이뤄져야 한다. 놀이의 신학이 진정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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