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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청주 탑동 양관과 충북 선교의 아버지 밀러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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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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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관(포사이드 기념관)

청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9세기말, 신대리 마을주민 오천보 등 3명이 행상을 다니다가 우연히 경기도 죽산군 ‘둠벙리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입고 마을로 돌아와 전도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로써 외국 선교사가 아닌 주민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세운 최초의 예배공동체 신대교회가 탄생하였다. 한편 청주 최초의 조직교회는 1904년 밀러(F. S. Miller 1866-1937, 민노아閔老雅)와 김흥경 등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이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1892년 한국에 와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선교활동을 하던 밀러 선교사는 1893년 서울에서 예수교학당(경신학교) 책임자가 되어 교명을 민로아학당으로 고치고 자신의 교육방침대로 발전시키며, 안창호 선생을 길러내는 등 기독교 교육에 힘썼으며, 1895년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부인 안나 밀러의 별세 후 1904년 제3대 정동여학당장 도티와 재혼했으며, 1931년 도티와 사별한 뒤 딘과 다시 재혼하였다.

충북지방 최초의 선교사였던 밀러 선교사는 청주지역에서만 44년간 선교활동을 하였다. 신대마을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청주시내로 들어와 제일교회를 기점으로 포교하며 청남학교, 청신여학교, 청서, 청북 등 6개 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을 실시하는 등, 선교와 근대 교육, 서양문화 보급 등에 힘썼다. 그리고 1936년 정년은퇴 후 개인적인 선교여행을 마치고 청주로 돌아와 1937년 10월6일 71세로 생을 마쳤다. 현재 일신여고 양관 옆에 그의 묘가 있다.

한편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의 거주와 선교, 교육 및 의료 활동 등을 위해 건물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청주시 탑동 일신여고에 있는 최초의 서양식건물 양관(洋館, 충북유형문화재 133호)이다. 밀러 선교사는 카긴(E. Kagin, 계군 桂君)선교사와 더불어 탑동 야산을 26원에 사들여 나무를 베고 1906년부터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30년 무렵까지 5만여 평의 땅에 붉은 벽돌을 쌓고 기와를 얹은 서양식과 한식이 복합된 양관 건물이 차례차례 들어섰다.

주민계몽과 보건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양관은 1906년 대홍수 때 탑동 언덕으로 피신한 이재민 200여명에게 관사와 부속건물 일부를 제공하며 먹을 것을 주기도 하며 청주 사람들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갔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교육을 일시 중단시킨 적도 있지만 양관에서의 교육은 얼마 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6·25 전쟁 중에는 양관은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청주제일교회는 인민군 사무실로 이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적잖은 성도들이 순교했다. 현재도 교회당 외벽에 남아있는 총탄자국은 민족상잔의 비극과 청주제일교회 순교자들을 떠오르게 해 숙연하게 한다. 현재 총6동 중 한 곳(1호)은 개인소유로 변했고, 일신여중, 고 교정에 자리 잡은 4채의 양관은 생활관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 박경진 장로 홀리원투어,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02-2230-5151)

초기 서양선교사들은 종교를 앞세운 ‘예수꾼’으로 비쳐져 서민들 정서를 혼란시킨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근대화에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유교와 불교문화가 발달하여 기독교 복음전파에 어려움이 많았던 청주지방에 세워진 양관은 개화기의 독특한 서양식 건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사적 의의뿐 아니라, 충북 기독교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고 해방 전까지 충북 기독교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며 많은 일화와 수난을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충북 기독교선교100년, 근대문화역사의 100여년과 함께 해 온 상징물로서의 그 의미가 매우 깊다고 하겠다.

-주소: 충북 청주시 상당구 탑동 9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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