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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땅끝마을 우학리교회와 이기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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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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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학리교회 전경.

 

▲ 박경진 장로 홀리원투어,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02-2230-5151) 1865년 평양에서 출생한 이기풍은 괄괄한 성격으로 싸움과 술로 젊은 날을 허송세월하였다. 그는 1890년, 평양 장터에서 어느 날 노방전도 하던 마펫(S. A. Moffett,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크게 다치게 하고, 건축 중인 장대현교회를 때려 부수는 등 ‘복음의 훼방꾼’이었었다.

한편 청일전쟁으로 이기풍 일가는 원산으로 피난을 하여 힘겹게 지내던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스왈른(W.L.Swallen) 선교사를 보자 문득 예전에 자기가 돌로 친 서양선교사 생각이 들었다.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괴로움을 느끼던 중, 어느 날 꿈에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니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고, 그 후 이기풍은 전군보 전도사의 간곡한 권유와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1896년 8월 15일 스왈른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후 그는 독실한 신앙인이 되어 날마다 전도하는 것이 하루 일과였을 정도로 완전히 예수에 미친 사람이 되었다.

1898-1901년까지는 매서인(賣書人)으로서 함경남북도 일대를 돌며 성경을 판매 보급하며 복음을 전파했다. 1901년에는 장로가 되었고 1902-1907년까지 황해도지역에서 조사로 활동하며, 1902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6월 20일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고 그해 9월 17일 조직된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최초로 이기풍, 서경조, 길선주, 한석진, 방기창, 송인서, 양전백 등과 함께 한국인 최초목사7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해 겨울 이기풍 목사는 ‘한국장로교 첫 외지선교사’로 임명받고 제주도를 향해 떠나게 되었는데, 인천을 출발하여 목포에 도착하니 풍랑이 너무 심해서 목포에 가족을 남겨둔 채 혼자 제주도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거센 풍랑과 싸우며 표류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이듬해인 1908년 봄에야 제주도에 도착했으나 제주도 주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졌던 편견과 핍박 속에서 굶주림과 생활고를 겪었다. 어느 날 해안가에 전도를 나갔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을 한 해녀의 도움으로 깨어나 그 해녀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이로써 제주선교의 첫 열매를 맺게 된다.

▲ 이기풍 목사 선교 기념비 이 같은 그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제주도의 개신교회사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에서 약 10년간 사역하다가 사임하고 광주 북문내교회, 순천읍교회, 벌교교회 등지에서 사역을 하였으며 돌산, 완도를 순회하며 교회를 개척하였다. 1934년에는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누구도 선뜻 가기를 꺼려하는 땅끝마을 우학리 작은 섬에 들어갔다. 1936년을 기점으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정면으로 반대함으로 1938년 체포, 구속되어 고난 받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그러나 고문후유증으로 우학리교회 사택에서 1942년 6월 20일 77세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기풍 목사의 선교 초기 중심교회이자 제주 최초교회인 성안교회 뜰에는 1984년 교회창립 76주년을 맞아 성도들이 직접 세운 <이기풍 목사 선교기념비>가 있다. 또한 제주도 <이기풍선교기념관>에는 그와 관련된 제주의 모든 선교자료를 집대성하여 전시하고 있다.

서양선교사와 교회를 핍박하던 박해자에서 한국인 최초목사이자 최초선교사로, 제주도 지역에 개신교를 전파한 ‘제주선교의 아버지’가 된 한국의 사도바울 이기풍 목사는, 평생 시골과 섬을 자청해서 찾아다니며 교회를 개척하는 등 진정한 목회자의 모범을 보였다. 또한 일제의 모진 박해와 위협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킨 순교자로서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역사에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더욱 빛나고 있다.

- 주 소 : 전남 여수시 남면 우학리 223번지 (담임 조강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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