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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조선의 별과 같은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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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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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헤론 선교사의 묘

 

 

▲ 존 헤론(John W. Heron.)(1858~1890) 영국태생의 존 헤론(John W. Heron.)은 미국으로 건너가 27세이던 1883년, 테네시종합대학교 의과대학을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고 학교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지만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위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보낸 이수정의 편지내용이 실린 선교잡지《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를 읽으면서 크게 감동을 받았다. “미국사람들이여!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주시오! 조선 백성들은 문명을 모르고 어둠 속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가슴깊이 새기며 조선을 향한 불같은 선교적인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8) 밤에 환상가운데 마케도니아사람이 손짓하는 것을 보고 아시아에서 유럽을 향한 사도바울의 발걸음이 유럽을 찬란한 기독교문화로 꽃피우게 했을 뿐 아니라 세계선교의 발판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헤론은 약혼녀까지도 병원이나 약국도 없는 가난하고 무지하며 미개한 나라에 왜 우리가 가야 하느냐고 만류했지만, 그의 굳은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마침내 1884년 봄, 그는 최초로 장로교 조선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후 일본으로 가서 조선의 마케도니아인의 역할을 한 이수정을 만났다. 조선말을 배우고 풍속을 익히며 조선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 일행이 1진으로 조선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마침내 헤론선교사 부부는 1885년 6월 21일 제2진으로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한편 ‘갑신정변’으로 생명의 위기에서 민영익을 서양의술로 구해낸 알렌은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의 초대원장이 되었다. 그 후 알렌이 고종의 주치의가 되면서 그 뒤를 이어 1887년, 헤론이 제2대원장이 되었다. 그 후 병원이름을 ‘제중원’으로 바꾸고, 특권층뿐만 아니라 가난한 백성들의 병을 정성으로 돌보아 주었다. 한편 헤론은 1890년 6월 25일, ‘한국선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를 창설하여 기독교 문서출판을 제일 먼저 제창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바쁘게 5년간을 격무에 시달리던 헤론은 가족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휴가를 갔는데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밤중에 제중원에서 말을 몰고 달려온 사람이 죽어가는 위급한 환자가 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즉시 발길을 재촉하여 제중원을 향하였다. 비를 맞으며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제중원에 도착하자마자 그냥 쓰러지고 말았다. 끝내 전염성 이질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을 하나님께 맡기고 1890년 7월 26일, 33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뜻밖의 슬픔을 당한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와의 논의 끝에 헤론을 조선 땅에 묻기로 하고 사저에 가매장하였다가 고종의 윤허로 양화진이 외국인묘지로 지정됨에 따라 1893년 10월 24일 양화진에 잠들게 되었다. 이로써 헤론은 양화진에 첫 번째로 묻힌 선교사가 되었다.

▲ 박경진 장로 홀리원투어,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02)2230-5151 그의 조선선교사역 5년은 조선백성들에게 별과 같이 빛나는 삶이었다. 오늘날 한국이 5만 교회 1000만의 성도로 성장한 것은 ‘누가 나를 위해 가겠느냐?’ 는 주님의 물음에 용감하게 나섰던 헤론 선교사와 같은 이들의 희생의 대가이다. 오늘도 세상의 소리 앞에 귀 기울이고 있는 우리들에게 헤론 선교사는 희생과 헌신의 삶을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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