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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오산학교와 남강 이승훈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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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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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정신, 민족사랑,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새로운 학문과 애국사상을 일깨운 오산학교-

오산학교는 남강(南岡) 이승훈(李承薰 1864~1930) 선생이 민족정신 고취와 인재양성을 위해 사재를 털어 설립한 학교이다.

평안북도 정주의 가난한 집에서 출생한 이승훈은 11세에 평양의 한 유기상회에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하 여 실패를 거듭하는 가운데서도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국운이 기울면서 그의 사업도 함께 기울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마저 박탈당하자 좌절과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중, 1907년 7월 우연히 도산 안창호의 ‘교육진흥론’이란 강연을 듣게 된다. “교육으로 백성을 일깨우지 않으면 독립도 있을 수 없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삶을 회개하고 민족을 위한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곧바로 세 가지를 이행했다. 첫째, 상투를 자르고 술, 담배를 끊었다. 둘째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 들여 고향에 오산교회를 세웠으며, 셋째로 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1907년 평북 정주에 세워진 오산학교(현 서울 오산중고교)는 7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지만, 설립자 이승훈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지금 나라가 날로 기우는데 그저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총,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깨어나는 일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7명의 학생밖에 없지만 차츰 자라나 70명, 700명에 이르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일심협력하여 나라를 남에게 빼앗기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부탁합니다.” 오산학교는 평민정신, 민족사랑,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새로운 학문과 애국사상을 일깨웠다.

한편, 이승훈은 1907년 안창호가 신민회를 조직할 때 참여하였고 1911년 105인 사건 관련자로 지목되어 4년 넘게 옥살이를 했다. 석방된 후 목회자가 되려고 52세 때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지만 1916년 교육사업에 다시 전념하고자 학업을 중단하고, 이후 자신이 설립한 정주 오산교회 장로가 된 후 평신도로 교회를 섬겼다.

그러다가 56세 때 3․1 독립운동 때 기독교계 대표로 33인에 가담하게 된다. 그는 “안방에서 편히 죽을 줄 알았더니 이제야 죽을 자리를 얻었구나.”라고 했다. 민족대표 서명을 앞두고 자기 종교인을 먼저 써야 한다며 좌충우돌하자, “이거 죽는 순서야. 아무를 먼저 쓰면 어때. 의암(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이름을 먼저 써”라며 천도교에 첫 자리를 양보했고 장로교 대표 자리마저 길선주에게 내주었다. 그는 내 종교, 종파에만 빠져 정의와 평화와 자유를 도외시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신앙을 경계했다.

한편 독립선언식이 끝나자마자 일본 헌병들에 의해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검거되었다. 감옥생활 중에 구약성경은 10번, 신약성경은 40번 읽었고, 아예 기도 생활을 하기 위해 일부러 감옥 안으로 들어온 사람처럼 철저히 기도 생활을 하였으며, 감옥 실내청소와 변소청소를 도맡아 했다고 한다.

오산학교 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 날씨가 몹시 추운 어느 날 변소에 가 보니, 꽉 차오른 오물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오물을 치우기 시작했는데, 이를 본 학생들이 자신들이 치우겠다고 하자 남강은 “열심히 공부하는 일은 여러분의 몫이고, 이런 청소는 내 몫입니다. 장차 모두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될 인재들에게 이런 일로 시간을 빼앗기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오산학교는 시인 김억, 김소월, 백석, 화가 이중섭, 목사 주기철, 한경직, 언론인 홍종인, 사상가 함석헌 등 민족의 일꾼을 무수히 길러냈다. 특히, 이승훈이 옥중에 있는 동안에 교장직을 맡았던 고당 조만식 선생은 9년간이나 학교를 이끌면서 신채호, 이광수, 염상섭, 유영모 선생들의 가르침 속에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 함석헌 선생 등의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오산학교는 지식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었다. 구한말 썩고 병든 사회를 기독교 신앙교육을 통해 새 세상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 건학 이념이었다. 처음 7명의 학생으로 시작해 전교생이 100명 남짓이었던 이곳 출신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한 사람이 심은 밀알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보여 탄압의 시련은 있었지만 남강의 정신 그대로 오산학교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민족사랑과 기독신앙을 하나로 엮은 남강 이승훈, 그리고 그 정신을 이을 오산학교의 전인교육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라고 하겠다.


- 주소: 서울 용산구 보광동 168번지 오산중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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