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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 - 헐버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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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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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헐버트 선교사

구한말, 고종황제는 <육영공원>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 설립을 계획하고, 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미국 정부에 요청하였다. 이에 3명의 젊은이들이 언어교사로 오게 되는데, 그 중 한 명이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이다.

헐버트는 유니온신학교 2학년 때인 1886년에 육영공원의 교사로 초빙되어 동년 7월4일, 다른 초빙교사인 벙커(D.A. Bunker), 길모어(G.W. Gilmore)와 함께 내한하였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재정 형편상 육영공원을 축소 운영하고, 교사들에 대한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자, 1891년 12월 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1893년 9월 목사 안수를 마치고 감리교선교회가 한성에 세운 삼문출판사의 2대 사장으로 선임되어 미 감리교회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내한하였다. 헐버트는 삼문출판사 책임자로 있으면서 <독립신문(1896.4.7 창간)> 탄생과정에서 서재필을 도왔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고종의 신변보호를 위해 존스, 게일, 언더우드, 애비슨 등 미국 선교사들과 교대로 고종을 호위하였다. 또한 “황성 기독교청년회(한국 YMCA)”를 설치하여 근대적인 사회개혁의식 고취를 통해 청년들을 미래의 지도자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헐버트가 YMCA운동을 사회운동의 성격을 띤 청년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한 점은 순수 신앙운동으로 전개하려고 했었던 언더우드 선교사와 달라 초창기에 혼돈이 빚어지기도 했으나, 한국의 YMCA운동은 헐버트의 입장대로 방향을 잡게 되었다. 창설 준비 위원장이던 헐버트는 1903년 한국 YMCA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한편, 1905년에 일본은 미국, 영국, 러시아와 차례로 가쓰라 태프트 밀약(7월), 영일동맹(8월), 포츠머드 조약(9월)을 맺으면서 한국병합을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정부는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고자 헐버트를 특사로 임명하여 1905년 10월 중순, 고종 황제의 친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은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1906년 6월 다시 한국에 온 헐버트는 고종 황제와 한국 YMCA 회원들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파견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특사 위임장을 받아 1907년 6월에 열리게 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파되어 헤이그에 직접 가서 이상설, 이준, 이위종 특사들의 활동을 도왔다. 하지만 헤이그 특사 파견은 실패로 돌아가고 일제는 결국 한반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국권 회복운동에 적극 협력한 헐버트는 일제에 의해 1908년 추방당하였다.

추방 후에도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에 정착하여 목사로 활동하면서 3 ·1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미국상원에 진술서를 제출하여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고 대한독립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해외의 조선유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었는데, 특히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도움을 주었고 3.1운동 후에는 이승만과 함께 “조선독립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처럼 헐버트는 조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그치지 않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힘썼다.

 

▲ 헐버트 선교사의 묘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은 헐버트와의 우정과 그의 조선 사랑을 기억하면서 그를 초청했다. 마침내 1949년 7월29일, 86세의 노인이 된 헐버트는 일제의 추방으로 한국을 떠난 지 42년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았으나, 일주일 만인 8월5일 별세했다. 대한민국은 애도하며 국장에 버금가는 사회장으로 그의 소원대로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하였다. 1950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묘비명을 써주기로 약속하였으나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키지 못했던 것을, 타계 후 50년 만인 1999년 8월5일에 비로소 김대중 대통령이 친필로 “헐버트의 묘”라는 묘비명을 썼다.

헐버트는 참으로 조선을 사랑하는 선교사였다. 일생을 두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쓰며 조선을 한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추방되어 미국으로 가서도 미국 각지를 돌며 강연을 통해 눈물로 한국과 한국인들의 억울한 사정을 대변해 주었다. 헐버트의 생애는 애국심과 박애주의 정신 등의 가치관이 희미해져 가는 오늘의 우리가 이어가야 할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준다. 1949년 헐버트가 한국으로 오던 당시 미국 AP통신 기자가 감회를 묻자 대답했다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는 말은 그의 묘비명에 남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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