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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오웬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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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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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웬 선교사 오웬(C.C. Owen 1867-1909, 한국명: 오기원, 오 원)은 햄프던-시드니 대학, 스코틀랜드 뉴 대학, 유니온신학교, 버지니아 의과대학 등에서 수학하였다. 1894년 목사 안수를 받고 1897년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어 1898년 11월5일 한국에 왔다. 1897년 10월1일 목포항이 개항됨에 따라 1898년 유진 벨(배유지) 선교사가 목포선교의 개척선교사로 결정되면서 서울에서 이주해 목포선교부를 개설하였고 오웬도 여기에 합류한다. 오웬은 1899년 전라남도 최초서양의료소인 목포진료소를 세우는 등, 의료사업에도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1900년 12월12일에 서울의 언더우드 목사 사택에서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조지아나(Georgiana W. 1869 -1952)와 결혼식을 올렸다. 의료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한 조지아나와 결혼함으로써 목포선교부는 더욱 힘을 얻어 활발해졌다.

오웬은 초기에 목포, 광주에서 의료와 선교를 병행하다가, 병원에서 자유로운 복음전파가 가능하게 되자 유진 벨과 함께 전도 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광주, 해남, 완도, 보성, 나주, 고흥, 화순, 광양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전도를 통하여 광주 송정리교회(1901), 해남 선두교회(1902), 광주 양림교회(1904) 등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밖에 전남 각 지역을 순회하며 프레스톤(J.F. Preston), 맥컬리(H.D. McCallie), 코잇(R.T. Coit) 등과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설교했다. 한 달 이상을 집을 비우는 일이 허다하여, 그의 어린 딸이 “아빠는 왜 집에 계시지 않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의료와 선교를 병행하다 보니 과로가 겹치고, 기후나 풍토에 적응해 가는 중에 몸이 쇠약해져 치료차 일시 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얼마 후에 다시 돌아온 그는 1904년 12월에 유진 벨 목사 가정과 함께 광주로 이사해 광주선교부를 개설하였다.

 

당시 목포항 개항으로 광주에도 변화의 급물살이 일고 있었는데, 이때 일본인들은 친일파 관료들의 도움으로 입지가 좋은 서문 밖에 정착한 반면에, 미국 선교사들은 서문 밖 광주천 너머 양림동에 서양촌을 형성하며 1905년 읍성 북문 안쪽에 ‘북문안교회’를 세우고 숭일학교와 수피아여고를 건립해 근대교육의 기틀을 다졌다. 수피아여고 뒷동산에 위치한 오웬 선교사 집 주변에는 당시 양림천의 거지들과 문둥병 환자들이 장사진을 쳤다고 한다.

한편 전도여행을 위해 광주를 출발하여 화순, 남평을 지나 장흥에 도착한 오웬은 주일날 아침부터 격렬한 오한이 왔다. 교우들이 가마를 준비하여 급히 광주로 걸음을 재촉했으나 수요일 새벽2시에야 광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윌슨(R.M. Wilson) 의사의 치료를 받으며 목포 포사이드(W.H. Forsythe) 의사에게 전보하였으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광주에 온 지 5년 만인 1909년 4월3일 급성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전보를 받고 목포에서 급히 배타고 영산강으로, 다시 나주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던 포사이드 선교사는 길가의 죽어가는 문둥병자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지체해 오웬의 죽음을 보지도 못했다.

▲ 오웬 목사 묘
▲ 박경진 장로 홀리원투어,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02-2230-5151) 광주 남구 양림동 호남신학대학 내에 있는 23인 선교사 묘지에는 오웬 선교사를 비롯하여 23인의 선교사가 잠들어 있으며 그 중 1분은 한국인이다. 그리고 기독병원 간호전문대학 안에 있는 오웬기념각(광주유형문화재26호)은 오웬과 그의 할아버지(William)를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 친지들이 보내 준 돈으로 1914년 건립되었다. 오웬 선교사의 뒤를 이었던 쉐핑(서서평) 선교사가 이 건물에서 조선 최초의 여자신학교인 이일 성경학교를 만들었고 간호전문인을 양성하는 학교를 만드는 등, 이곳에서 한국 의료역사의 큰 꿈도 이루어지고 기독교 선교역사의 미래도 펼쳐졌다. 지금은 기독간호대학의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오웬을 ‘오 목사(吳 牧師)’라 불렀고, 그의 묘비에도 ‘님’이라는 존칭 없이 ‘吳牧師’라고만 새겨져 있다. 이처럼 그는 인생의 황금기에 조선에 와 친숙하고 가깝게 다가서며 예수의 좋은 친구로 이 땅 사람들의 좋은 친구로 섬기다가 마흔 두 해 짧은 삶을 남기고 떠났다.

-주소 :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67-1 <오웬기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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