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 오웬 선교사
작성자 정보
- 박경진 장로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2,118 조회
본문
![](/news/./photo/201003/2225_1711_4541.jpg)
오웬은 초기에 목포, 광주에서 의료와 선교를 병행하다가, 병원에서 자유로운 복음전파가 가능하게 되자 유진 벨과 함께 전도 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광주, 해남, 완도, 보성, 나주, 고흥, 화순, 광양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전도를 통하여 광주 송정리교회(1901), 해남 선두교회(1902), 광주 양림교회(1904) 등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밖에 전남 각 지역을 순회하며 프레스톤(J.F. Preston), 맥컬리(H.D. McCallie), 코잇(R.T. Coit) 등과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설교했다. 한 달 이상을 집을 비우는 일이 허다하여, 그의 어린 딸이 “아빠는 왜 집에 계시지 않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의료와 선교를 병행하다 보니 과로가 겹치고, 기후나 풍토에 적응해 가는 중에 몸이 쇠약해져 치료차 일시 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얼마 후에 다시 돌아온 그는 1904년 12월에 유진 벨 목사 가정과 함께 광주로 이사해 광주선교부를 개설하였다.
당시 목포항 개항으로 광주에도 변화의 급물살이 일고 있었는데, 이때 일본인들은 친일파 관료들의 도움으로 입지가 좋은 서문 밖에 정착한 반면에, 미국 선교사들은 서문 밖 광주천 너머 양림동에 서양촌을 형성하며 1905년 읍성 북문 안쪽에 ‘북문안교회’를 세우고 숭일학교와 수피아여고를 건립해 근대교육의 기틀을 다졌다. 수피아여고 뒷동산에 위치한 오웬 선교사 집 주변에는 당시 양림천의 거지들과 문둥병 환자들이 장사진을 쳤다고 한다.
한편 전도여행을 위해 광주를 출발하여 화순, 남평을 지나 장흥에 도착한 오웬은 주일날 아침부터 격렬한 오한이 왔다. 교우들이 가마를 준비하여 급히 광주로 걸음을 재촉했으나 수요일 새벽2시에야 광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윌슨(R.M. Wilson) 의사의 치료를 받으며 목포 포사이드(W.H. Forsythe) 의사에게 전보하였으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광주에 온 지 5년 만인 1909년 4월3일 급성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전보를 받고 목포에서 급히 배타고 영산강으로, 다시 나주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던 포사이드 선교사는 길가의 죽어가는 문둥병자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지체해 오웬의 죽음을 보지도 못했다.
![](/news/./photo/201003/2225_1710_4526.jpg)
![](/news/photo/200908/1386_1066_5215.jpg)
당시 사람들은 오웬을 ‘오 목사(吳 牧師)’라 불렀고, 그의 묘비에도 ‘님’이라는 존칭 없이 ‘吳牧師’라고만 새겨져 있다. 이처럼 그는 인생의 황금기에 조선에 와 친숙하고 가깝게 다가서며 예수의 좋은 친구로 이 땅 사람들의 좋은 친구로 섬기다가 마흔 두 해 짧은 삶을 남기고 떠났다.
-주소 :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67-1 <오웬기념각>
관련자료
-
이전
-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