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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윤치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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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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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photo/201007/2561_2018_2026.jpg)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윤치호는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도쿄로 향하였다. 그는 글로써 일본 관리와 대화하였는데, “언제부터 기차가 다녔습니까?”는 질문에 ‘1872’라고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또한 일본의 근대화가 기독교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는 3개월간의 시찰을 마친 후 약 2년간 그곳에 남아서 일본 최고의 개화사상가이자 기독교인인 나카무라(中村正直)가 설립한 중등과정의 사립학교인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고, 1883년 1월부터 요코하마에 있는 네덜란드 영사의 협력으로 영어를 배웠다. 또한 이 시절 국내 개화파 인사를 비롯한 일본개화파인사, 재일 외국인 외교관들과도 교류를 쌓으며 국제정세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는 1883년 5월 초대 주한 미국 공사로 부임하는 푸트(L.H. Foote)의 통역관으로 임명받고 함께 귀국하였다. 그 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主事)로 임용돼 통역과 공문서 번역 일을 보면서 개화파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갔다. 그런 개화파 인사들과의 친분 때문에 1884년 12월4일 일어난 갑신정변 실패 후 공모자로 몰려 상하이로 망명 겸 유학길에 올라야만 하였다. 이때 푸트 영사의 추천으로 상해에 있는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 앨런이 설립한 미션학교인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하여 3년 반동안 공부하였다. 원치 않는 망명생활에 낙심하여 처음 한동안은 주색잡기에 빠져 방황의 세월을 보냈으나, 중서서원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으면서 변화되고 미국 남감리회 소속 교인이 된 윤치호는 선교부의 추천으로 1888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감리교 다락방 본부가 있는 내슈빌에 위치한 밴더빌트대학에 입학하여 조선인으로서 첫 유학생이 되었다. 이때 내슈빌에서 열린 미국 세계선교신학생대회에, 안식년으로 돌아와 있던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강사로 참여하였다. 이 때 미국 남장로교 소속 신학생들이 너도나도 조선선교사로 지망을 하였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조선의 호남지방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언더우드와 윤치호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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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의 선구적 개혁자며 기독교인으로 애국가를 지어 민족의 여망을 깨우친 교육자며 언론인이기도 한 좌옹 윤치호는 뼈아픈 역사의 현장 속에서 영욕의 세월을 살다 죽어갔다. 애국가 의 역사적인 가사를 작사하는 공적을 남겼지만 일제 말엽의 불운의 친일행위로 말미암아 결국은 ‘작사자 미상’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윤치호의 생애는, 역사의 냉혹한 교훈을 알아 이 시대를 사는 참된 기독교인으로서 한 길만을 끝까지 치열하게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아픈 교훈으로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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