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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산 성령운동이 독립운동으로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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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용상 기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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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산 성령운동이 독립운동으로 확대

한국영성연합, 마리산 성령운동 102주년 기념 학술부흥회

 

한국영성연합과 한국크리스천포럼, 강화목우회가 주관하는 마리산 성령운동 102주년기념 학술부흥회 및 문산교회 성전봉헌 보고 및 박만수 장로 취임예식이 지난 19일 문산교회에서 개최됐다.

하관철 목사(문산교회)의 사회로 열린 이날 모임은 박창주 장로(문산교회)의 온전한 성전봉헌 보고, 김재근 감리사(강화남지방)의 집례로 박만수 장로 취임, 이규학 감독(인천제일교회)의 설교 순으로 진행됐다.

이 감독은 ‘엘리야의 아들들이 어디 있는가?’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흥이 지체되고 멈추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엘리야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엘리야처럼 기도하는 엘리야의 아들들을 찾고 계신다”며 기도로 승리하는 삶을 살자고 당부했다.

이어 열린 학술발표회에서 발표자 김명구 박사(연세대학교)는 ‘1907년의 사회학, 정치학 그리고 마리산 부흥회’라는 제목의 강의를 통해 “일반적으로 1907년을 이야기할 때 시대적인 배경을 빼 먹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데 1902년 러일전쟁을 비롯해 당시의 정치적이고 시대적인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당시 한국은 러시아 입장에서는 남으로 가기 위한 관문이고, 일본은 북방으로 가기 위한 교두보였기에 양보할 수 없는 곳이었다”며 “이러한 정치적이고 지리적으로 중요한 한국임에도 당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한국을 냉소적으로 보고 안 좋은 감정이 있어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유리하게 전개되자 을사늑약을 눈감아주는 오류를 범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김 박사는 “황실 고문 헐버트는 을사늑약과 관련 미국의 변절행위에 대해 분개했지만, 이토오 히로부미는 당시 중국과 한국, 일본을 관할하는 미국의 해리스 감독을 불러 정치에는 관여치 말라며 조건적인 선교를 허락했고 선교사들은 이를 약속했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1907년 한국에서 미국 선교의 커다란 결실이 맺어지자 미국의 정치적인 거물들이 한국을 찾아와 한국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보고 감탄하게 됐고, 1912년 105인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본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는 등 미국이 한국독립에 참여한 동기가 바로 1907년 부흥”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김 박사는 “이러한 1907년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마리산 성령운동으로 확산되고 나중에 민족의 독립운동을 하는 데도 기여하게 됐다”고 마리산 성령운동의 의미를 강조했다.

 

윤용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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