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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주신 달란트로 전 세계 복음 증인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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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용상 기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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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주신 달란트로 전 세계 복음 증인될 것”

 

화제의 인물 - Detmold 국립극장 최초여성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이혜령

 

“저는 이제, 제 사명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제게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에 복음의 증인이 되겠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독일의 데트몰트 국립국장의 최초 여성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이혜령 씨는 지난 7월에 독일 Nordwestdeutsch(노르트베스트도이취)오케스트라와 드보르작 심포니 9번 '신세계'를 훌륭하게 지휘했다. 그녀는 탁월한 몸 동작과 세련된 손짓으로 다이내믹하게 연주를 이끌어냈으며, 그녀만의 프레이즈 표현은 이 오케스트라와 청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이처럼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것은 다른 음악전공자처럼 처음부터 음악을 배운 것이 아니라 어릴 적 그저 남들처럼 취미생활로 피아노를 배우고, 그나마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더 이상 피아노를 배울 수 없어 다니던 학원도 그만두는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혜령 씨는 “어머니가 사업하던 천안 아파트 현장이 부도가 난겁니다. 어머니의 전 재산이 사업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때부터 피아노 레슨도 못 받게 되었지요. 그래서 저는 동네교회에 가서 추운 겨울에 손 얼어가며 연습을 하게 되었고 그 후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었답니다.”며 어려운 시절을 회상했다.

대학교에 들어갔지만, 그녀는 학업에 충실하기 보다는 남들처럼 대학에 붙었다는 기쁨 속에 마냥 친구들과 놀고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신앙생활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치 않게 대학교 3학년 때 ‘마술피리’라는 오페라 피아노 반주자가 되면서 오페라의 매력에 빠져들게 됐다.

이혜령 씨는 “혼자와의 싸움을 견뎌야하는 피아노 전공과는 달리 오페라는 종합예술로써 성악가, 연출가 등 여러 분야의 사람들과 다함께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보람되고 기쁜 일인지를 알게 되었지요.”라며 오페라와의 인연을 설명했다.

음악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별로 없었던 그녀에게 오페라는 그녀 안에 꿈틀대는 새로운 음악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 때부터 음악의 참된 매력을 느끼고 열심히 연습하고 피나는 노력을 거듭한 끝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오페라코치과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국립오페라단의 피아니스트가 되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경험과 인맥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재학 중 유학을 경험한 많은 선생님들의 충고와 조언을 듣는 가운데 그녀는 자연스럽게 유학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독일 오페라극장 취직을 목표로 하고 있을 때쯤, 독일에서 지휘를 직접 배우면 극장취직에 훨씬 유리하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고, 지휘의 기초만 조금 배운 가운데 지난 2012년 2월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 해 7월 데트몰트 국립음대 지휘과에 합격을 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하고 거칠 것이 없는 그녀의 행보였지만, 유학의 길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유학 5개월 만에 데트몰트 국립음대 지휘과에 합격은 했지만, 5개월의 짧은 유학생활 동안 배운 짧은 독일어만으로 학교생활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거기다 기초만 배웠던 지휘실력으로 독일에서 학업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1,2년 동안은 정말 힘든 유학생활을 경험하게 되었다.

언어가 부족해 한쪽에 숨어 수없이 울기도 했고, 참으로 외롭고 고독한 유학생활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믿어주고 응원해 주는 가족들과 지인들이 있기에 결코 주저하거나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며 학업에 정진을 하자, 다행히 적응속도는 상상외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련이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유학생활에 많이 익숙해지고 적응이 될 무렵인 2014년 10월경 어머니의 사업이 또 다시 힘들어져 더 이상 지원이 어려워 학업을 접고 한국에 귀국해야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아쉽지만 마음을 접고 이래저래 상황을 정리하는 중, 뜻밖에 데트몰트 국립극장에서 피아니스트 한명이 수술을 하여 급하게 임시피아니스트를 찾는다는 연락이 와 임시피아니스트가 되어 다행히 독일에 머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 해, 극장에서 공식적으로 오디션 공고를 걸었고, 당당하게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여성 최초로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왜 나는 이렇게 운이 좋지? 왜 오페라가 좋아졌지? 왜 지휘를 하게 되었지? 왜 유학길에 올랐지? 왜 어머니 사업이 실패했을 때 때마침 극장에서 전화가 왔지?”라는 수많은 물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그 답을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내린 결론은 바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어머니 고영선 목사(주찬양교회)의 기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삶 속에 항상 성령께서 함께 하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음은 자신의 뜻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큰 감명과 회개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내가 예수님을 가까이 할 때나 멀리 할 때나, 그 분은 언제나 제 옆에 계셨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속에 제가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는 제가 독일에서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며 살아야 합니다.”라며 하나님께 서원을 하며 다시한번 지휘봉을 힘 있게 쥐어본다.

 

윤용상 기자

 

[이혜령 씨 프로필]

-수원대학교 피아노과 학사. 석사

-한국예술종합학교 오페라코치과 아티스디플롬

-전 국립오페라단 피아니스트

-프랑스 Musicale de Fontenay le Comte 아카데미 수료

-Detmold 국립음대 지휘과 만점졸업

-Bad Driburg Stadtkapelle 최초여성지휘자 역임

-현 Detmold 국립국장 최초여성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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